
2019년 부산 누리마루APEC하우스에서 제1차 한·메콩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2025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릴 ‘아세안+3 정상회의’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아세안 외교 무대가 될 전망이다. 이전 문재인 정부는 아세안을 중시하는 신남방정책을 통해 한국이 주도적으로 한·메콩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아세안과의 전략적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한·메콩 정상회의는 중단됐고, 그 공백은 중국과 일본이 다양한 지원 정책을 통해 빠르게 메웠다. 신남방정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독자적 외교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던 아세안의 설립 취지와 맞닿아 있는 다자주의 기반 외교 전략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신남방정책을 폐기했고, 편중된 친미·반중 노선으로 아세안과 쌓아온 전략적 외교 자율성을 무너뜨렸다. 이제 이재명 대통령은 신남방정책 2.0을 통해 아세안과의 신뢰를 회복하고, 한국과 아세안이 함께 지역 내 전략적 존재감을 강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 정책을 단순히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 정교한 실행 중심의 접근 방식이 절실하다
이재명 정부가 새롭게 추진해야 할 ‘신남방정책 2.0’은 지난 5월 아세안이 채택한 ACV 2045(ASEAN Community Vision 2045)를 충실히 반영해 설계해야 한다. ACV 2045는 향후 20년간 아세안이 직면할 16가지 핵심 이슈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담고 있다. 한국은 이 이슈들을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할 중요한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이 16가지 이슈는 크게 ▲지정학·외교·안보 분야(4개) ▲경제·산업 전환 분야(4개) ▲지속가능성과 기후 대응 분야(4개) ▲포용사회 분야(4개)로 구분된다. 아세안은 이러한 문제들을 자체적으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으나 예산과 기술의 한계로 실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 일본과 차별화하며 한국만의 강점을 부각할 수 있는 분야에 선택적으로 집중해 협력해야 한다. 이는 인프라 투자 중심의 물량 공세를 펼치는 중국이나, 공적 금융 지원에 집중하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 될 것이다.
지정학, 외교·안보 분야 협력
아세안이 가장 시급하게 확보해야 할 것은 ‘전략적 자율성’이다. 미·중 갈등이 격해지면서 아세안 각국은 미국과 중국 앞에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아세안 내부에서도 친중과 반중 노선 갈등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남중국해(베트남 동해·필리핀 서해)에서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물리적 충돌을 넘어 자칫 전쟁으로 확산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과 일본을 필두로 한 반중 연합은 아세안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군사 장비를 지원하며 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포괄적 중립 외교’를 표방하던 아세안 창설 정신은 흐릿해지고 있다. 이처럼 미·중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싶은 아세안에 전략적 균형을 지켜줄 수 있는 제3의 파트너로 한국이 제격이다. 한국은 미국과 안보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경제협력을 병행해온 실용 외교의 경험이 있다. 아세안의 중립적 자율외교 노선을 지지하며 평화유지 역량 강화, 해양안보 공동 훈련, 사이버 안보 협력 등을 통해 전략적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군사 강국이면서도 아세안에 군사적으로 압박하지도 않고 제도와 연대, 외교적 신뢰를 통해 아세안과 공동 전략을 세울 준비가 된 곳이 한국이다.
경제산업 전환 분야
세계 경제가 빠르게 디지털화되면서 노동시장 구조가 급변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기존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한 수출 중심 산업 구조를 가진 아세안 국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특히 젊은 인구가 풍부한 아세안은 청년 일자리 확보에 실패할 경우 사회적 불안이 확산할 우려도 크다. 한국은 K디지털 트레이닝, AI 교육 플랫폼, 디지털 정부 혁신 등에서 쌓아온 성과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동 직업훈련센터 설립 ▲디지털 거버넌스 자문 ▲청년 창업 허브 운영과 같은 협력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 아세안 각국은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 행정 체계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려움도 겪고 있다. 특히 전자정부로의 전환은 신속한 행정 서비스와 투명한 정부 운영을 위해 시급한 과제다. 이에 비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ICT 인프라, 선진 디지털 행정 시스템, 그리고 민간 플랫폼 역량이 융합된 전자정부 운영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선진국이지만 디지털화에 뒤처진 일본에 비해 한국은 아세안에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솔루션을 지원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 외교 시험대, 신남방 2.0](https://img.khan.co.kr/weekly/2025/06/20/news-p.v1.20250620.d41db8e4b2d6459189412737247891d7_P1.jpg)
지속가능 기후 대응 분야
아세안은 홍수, 폭염, 해수면 상승 등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생존 위협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급속한 산업화가 더해지며 식량, 물, 에너지 안보까지 흔들리고 있다. 아세안 대다수 국가는 문제의 심각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역량이 부족하다. 상당수 국가는 탄소 배출 통계조차 정확히 산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의미 있는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탄소중립 정책, 스마트 재난관리 시스템, 디지털 농업 및 수자원 관리 등 녹색경제 전환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아세안이 주력하고 있는 ‘블루 이코노미(해양경제)’ 분야에서도, 해양생태계 보전, 스마트 해상물류, 해양관광의 녹색 전환 등에서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를 기반으로 해양환경 모니터링 공동연구, 스마트 해상물류 시스템 구축, 지속가능한 어업 프로그램 개발 등 아세안 맞춤형 협력이 가능하다.
한국은 아세안의 현실적인 미래형 파트너
이재명 정부는 아세안이 2045년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16가지 핵심 이슈를 국내 기업 및 기관들과 당장 공유해야 한다. 스타트업부터 대기업, 공공 부문까지 폭넓은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아세안 공동 미래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은 단순한 지원국을 넘어 기술, 제도,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동반자형 파트너로 거듭나야 한다. 아세안과의 협력은 한국에도 큰 기회다. 6억9000만명의 젊고 역동적인 시장을 선점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다. 또한 ICT·디지털 분야에서 새로운 수출 활로를 확보하는 경제적 이익도 창출할 수 있다. 동시에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아세안과 연대는 한국 외교의 다변화와 외교 공간 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신남방정책 2.0은 한국과 아세안이 공동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략적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다가올 아세안+3 정상회의를 계기로 신남방 2.0의 비전을 선포하고, 한국이 아세안과 함께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동아시아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호찌민|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