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창원시 불모산에서 내려다본 전경. 창원공단(왼쪽)과 주거지역(오른쪽)을 가로지른 창원대로를 붉은빛의 차들이 달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지난 5월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슬로바키아 정부 및 공공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방문했다. 방문단은 반세기 전만 해도 완전한 불모지였던 곳이 지금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개발 집적지로 성장한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어 폴란드 정부 관계자들과 판교에 있는 국내 대표 정보통신(IT) 기업들을 방문했고, 이들은 짧은 기간 내에 이룩한 성과를 접하며 “한국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 사례가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다수의 지역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지역 간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방문단에 설명했다.
최근 2년여간 창원, 사천, 거창, 울산, 포항, 대구, 나주, 광주, 전주, 군산, 새만금, 대덕연구개발특구, 세종, 오송, 원주, 인천경제자유구역, 성남 판교, 수원 광교 등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며 산업 현장을 직접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수도권과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제외하면 이들 지역은 대체로 제조업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창원은 기계, 사천은 항공, 광주는 광산업, 전주는 탄소, 원주는 의료기기 등 각 지역은 특정 산업과 긴밀하게 연계돼 지역경제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져
이러한 지역 산업 현장에서는 미래에 대한 우려와 희망이 교차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산업 기반이 구축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재정 투입과 지역민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으며, 이는 각 지역의 발전 토대가 됐다. 그러나 수도권을 제외한 다수의 지역에서는 산업 현장 관계자들이 지역경제의 미래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주력산업의 성장 둔화와 미래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GM이 철수한 이후 전북 군산의 상황이다. 군산은 현재 뚜렷한 대체 산업을 찾지 못해 지역 상권마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편 방위산업 호황으로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경남 창원조차 지역대학 졸업생 등 젊은 인력이 수도권으로 유출되면서 산업활동 위축과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 연합뉴스
이러한 우려에도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를 돌아보면 지역경제에는 여전히 희망의 요소가 존재한다. 한국의 지역 주력산업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목표 아래 오랜 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육성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지역에는 수많은 기업과 다양한 지원기관, 교육기관이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강원도 원주의 의료기기 산업의 경우 1979년 연세대 원주캠퍼스 보건학과에 전국 최초로 의공학 전공이 신설됐는데, 이는 1998년 원주 의료기기 창업보육센터가 설립되는 기반이 됐다. 창업보육센터는 개소 당시 11개 업체로 시작했으나 2023년 현재 182개 기업이 약 6700명을 고용하고 연간 1조원의 생산을 기록하는 의료기기 산업 집적지로 성장했다. 이는 불모지에서 이룬 괄목할 만한 성과다. 소수 대기업이 아닌 다수의 중소기업이 성장하며 이룬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지역경제에서 발생하는 미시적 변화는 궁극적으로 장기적인 무역 패턴의 변화로 이어진다. 한국 경제의 경우 이러한 변화는 비교우위 산업의 수는 줄어들고,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도가 심화하는 ‘초-특화(hyper-specialization)’ 현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2000년과 2024년의 상위 수출 품목을 비교하면, 2024년에는 반도체(21%), 자동차(14%), 컴퓨터 및 기계류(12%)가 상위 3개 품목을 차지하며 전체 수출의 47%를 점유했다. 반면 2000년에는 반도체(12%), 자동차(8%), 선박(7%)이 상위에 위치했고, 이들 세 품목의 합계는 27%에 불과했다. 24년간 반도체와 자동차는 1위와 2위를 유지하며 비중이 크게 증가했고, 3위 품목은 선박에서 기계류로 변화했다. 이를 통해 2000년에는 다양한 산업군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경쟁력 있는 산업의 범위가 축소되고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국제무역에서 나타나는 초-특화 현상은 지역 간 경제 격차 확대의 또 다른 양상이다. 초-특화는 산업구조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이에 따라 지역경제의 활력이 점차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현상은 장기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상호작용하며 지속적으로 심화한다.
따라서 지역산업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도록 정책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한국 경제는 초-특화된 무역구조를 통해 무역흑자를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산업구조의 다양성 확보와 저변 확대 측면에서는 한계가 드러났다. 최근에는 배터리, 바이오, 화장품, K컬처 등 새로운 성장 동력이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산업정책의 완전한 실패라기보다는 산업 저변 확대라는 정책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경남 거제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역산업 재설계 위해 정교한 산업지도 필요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산업 정책을 재설계하는 데 있어 산업의 미시적 공간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교한 산업지도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제공하는 산업단지 현황 지도는 산업단지 중심의 정보에 한정돼 있어, 지역별 산업구조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강원도의 경우, 다양한 업종이 분포해 있음에도 현행 지도에는 일부 산업단지만 표기돼 있고, 대덕연구개발특구 역시 주력 업종만이 단순 표기돼 세부 산업구조를 알기 어렵다. 산업단지공단이 보유한 정보와 역량이면 기초지자체 단위에서 산업 및 업종 분포를 세분화한 지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실제 지역 내 다양한 산업의 존재와 특성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업에 대해서도 기초지자체 단위에서 공간적 분포를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도시 집적도가 높은 의료, 금융, 법률 등 지식기반 서비스업은 물론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서비스업종의 지역별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정보는 통계청이나 지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정책 수립과 지역경제 분석에 활용할 수 있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지역별 배치를 장기간에 걸쳐 기초지자체 단위로 분석하면 각 지역의 경쟁력과 산업구조 변화 양상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미시적이고 시계열적인 분석은 지역산업 정책의 방향 설정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