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연 진보당 대선후보가 지난 4월 25일 서울 강북구 미아역 인근 마트에서 벌어진 여성살해 현장을 찾아 피해자를 추모했다. 진보당 제공
엄마는 퇴근이 늦어도 빈손으로 집에 오지 않았다. “뭐 좀 사갈까?” 하는 문자에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료나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를 요청했다. 현관 밖 복도에서부터 바스락거리는 마트 비닐봉지 소리에 엄마의 도착을 미리 알았다. 내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땐 이런 연락이 왔다. “장 봐놨어.” 그런 날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랐다. 거실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찼고, 엄마는 마트에서 사온 식자재로 만든 국과 반찬을 내어줬다.
그래서일까. ‘장을 본다’라는 말엔 자연스럽게 식구가 떠올랐다. 혼자서는 배달음식으로 때울 끼니를, 누군가 집에 초대한 날이면 장을 봐 해결했다. 한때는 엄마의 장보기를 ‘노동’으로 여기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속내를 털어놓자 엄마는 “그런 시간이 나를 살게 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나 역시 아는 나이가 됐다.
마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 22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마트에서 60대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장을 보던 중에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장보기와 죽음을 함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피해자의 가족관계나 신상이 알려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의 문장들 위로 나를 먹여 살린 엄마와 수많은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롯이 먹이고 먹는 일에 집중하며 절대적으로 안전해야 할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 죽임을 당했다. 피해자는 내가, 내 엄마가, 누군가의 식구가 될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마주한 죽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미아역 살인사건 현장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는 이 같은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불안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숨진 피해자 외에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다른 피해자도 마트에서 일하던 여성이었다. 온라인상에선 이 사건을 ‘묻지 마 범죄’가 아닌 ‘여성 테러 범죄’로 명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범행 현장인 마트 앞에는 ‘강남역 9주기를 앞두고 또다시 발생한 페미사이드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적힌 팻말이 세워졌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다음 날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남몰래 추모 현장을 찾았다. 이듬해 열린 조기 대선 국면에서 그는 ‘성평등 공약’을 발표하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언급하며 “더는 젠더 폭력을 눈감고 쉬쉬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를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9년 전과 지금의 풍경은 매우 다르다. ‘여가부 폐지’ 다섯 글자로 반페미니즘 정부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몰락한 뒤 치르는 조기 대선이다. 그런데도 여성정책은 실종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 양당 모두 젠더 폭력은 물론 성평등 정책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이번 사건의 추모 현장을 방문한 대선후보도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와 권영국 정의당 대표, 한상균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 대표 등 소수정당 인사들뿐이었다. 유력 대선주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대한민국’, ‘진짜 대한민국’을 떠들고 있다. 과연 그 나라에서는 여성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