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노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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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홈플러스 피해당사자 증언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홈플러스 피해당사자 증언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홈플러스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를 취재했다. 사모펀드 MBK가 홈플러스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직영 노동자, 협력업체 노동자, 입점업체 점주, 배송 노동자 등 홈플러스 종사자들이 불안해진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날 내게 인상 깊었던 건 의원회관 세미나실을 가득 메운 50대 여성들이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모인 이들은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하하 호호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중장년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걸 본 게 언제였을까 싶다가도 이들이 계산, 진열 업무 등을 하며 마트 운영을 떠받치고도 하루아침에 자본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그들을 보니 엄마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식 다 키우고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 엄마’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홈플러스 여성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엄마처럼 경력단절 후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직장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도 홈플러스는 대형 마트니까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터였다.

1960년대생인 엄마는 갑자기 기운 가세에 대학 진학과 꿈을 포기하고 스무 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결혼·육아로 인한 공백기를 거치고 내가 일곱 살 무렵부터 엄마는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는 “일하지 않으면 아픈 사람”이라 쉼 없이 일했지만, 늘 계약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첫 복귀직은 ‘포스코 견학 안내 홍보사원’이다. 광양제철소를 견학하러 온 관광객을 데리고 공장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철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계약직이라도 엄마는 붙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어린 나를 앉혀두고 공정별 설명이 빼곡히 적힌 A4용지 여러 장을 그대로 외우는지 체크해보라고 할 정도였다. 홍보사원 일이 끝난 뒤로도 엄마는 규모가 작은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일했다.

그러던 엄마는 50대 초반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계약직 취업도 어려워지자 “건강만 허락한다면 자격증으로 평생 일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엄마 친구들도, 주변 언니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 자격증을 많이 준비한다고 했다. 한 직장에 정규직으로 소속되지 않은 중장년 여성 노동자에게 노후 보장으로 남은 선택지는 자격증으로 대변되는 돌봄 노동뿐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지만, 엄마의 선택을 이해했다.

엄마는 임금이 적어도, 어깨가 결리고 다리가 아파도 이 일 자체를 뿌듯해했다. 이왕 하는 김에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서 지역에 요양보호센터를 운영해볼까 하는 작은 꿈도 꾸기 시작했다.

이 지면에 엄마의 노동사를 길게 할애한 것은 주목받진 않지만 묵묵히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장년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으로 기록하기 위함이다. 국회에 모인 홈플러스 여성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노동사를 간직하고 지금 이 순간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중장년 여성의 노동이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봐야만 기사로 반짝 조명되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빛이 나길 간절히 바란다.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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