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윤석열 파면 선고 이후 과거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했던 말이 회자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서 문형배는 자신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운 김장하 선생을 회고하며, “‘선생님께서는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법관이 돼서도 평균의 삶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그의 정신적 바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의 질문은 꼬리를 잇는다. 문형배는, 김장하는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됐을까? 많은 사람이 ‘형평운동’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고 차별 철폐와 불평등 해소, 인권 증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장하 선생의 삶을 이야기한다. 남김없이 나누고 불평등 해소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을 닮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김장하 개인에 대한 추앙을 넘어 그 이면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물어야 한다.
김장하가 지키고 문형배가 자란 경상남도 진주는 ‘형평운동’이 탄생한 본고장이다. 형평운동은 봉건사회를 넘어 근대를 맞던 조선 말기의 격변을 배경으로 한다. 전통 신분 질서가 해체되던 그즈음, 백성은 탐관오리들과 왕조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이는 조선 말기 격변으로 이어졌다. 당시 농민들이 발표한 ‘폐정개혁안’에는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백정 차별을 철폐하며, 과부의 재혼을 허가하라는 요구가 포함돼 있었다. 이를 위해 싸우다 수십만명의 평범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 파면만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변화될까?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복원하고 ‘형평’을 위한 운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백정’의 천민 신분이 폐지됐지만, 차별은 여전했다. 제도개혁만으론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형평운동은 현실의 차별과 착취에 맞서 끊임없이 ‘평등(형평)’을 추구하기 위해 조직됐다. 형평운동의 과제는 오늘날 부유세를 통해 빈곤층의 사회보장을 향상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며, 성별 임금 격차와 직장 내 성폭력을 척결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12·3 비상계엄 후 소설가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 바 있다. 지난겨울 연일 광장을 지키며 윤석열 퇴진과 사회 대전환, 평등을 외쳤던 우리의 투쟁은 ‘어떤 죽은 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025년의 평범한 시민들이 있었기에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된 선고를 할 수 있었듯, 문형배의 기억 속엔 형평운동가 김장하가 있었고, 형평운동 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존엄한 삶을 위해 동학에 투신한 무명의 농민들이 있었다.
윤석열 파면만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변화될까? 여전히 대학에선 학생운동 동아리들을 향한 억압이, 직장에선 노동조합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의 고공농성은 지속하고 있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싸움들도 여전하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래 경쟁과 착취로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고 ‘형평’을 위한 운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수십년 아니 수년 후 우리 자신을 지켜줄 ‘우리’가 있는가? 제2, 제3의 김장하, 형평운동, 동학이 있는가? 위기의 시대에 격변은 다시 온다. 이제 우리의 버팀목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