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모든 善은 여유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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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6년,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 최정원 인터뷰

36년간 배우 최정원의 연습실은 한결같다. 남이 100번 하면 그는 1000번을 연습한다. 데뷔 초나 최정상에 있는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가장 독한 연습벌레다. /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36년간 배우 최정원의 연습실은 한결같다. 남이 100번 하면 그는 1000번을 연습한다. 데뷔 초나 최정상에 있는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가장 독한 연습벌레다. /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가. 나는 이걸로 추락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죠. 연극 <파우스트> 대사처럼 내가 너무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노력하는 자는 방황을 한다. 내가 노력하고 있구나. 이 작품이 너무나 중요한 자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강남구 세곡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최정원(55)은 21년 만에 하는 1인극 <지킬앤하이드>가 연기 인생 36년을 통틀어 손꼽는 작품이 되기까지의 ‘방황 행군’을 넌지시 풀어 놓았다.

큰 글씨로 뽑아 68페이지에 달하는 대본부터 압박이었다. 연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대사다. 주요 캐릭터만 8명, 스치는 캐릭터들까지 합하면 열댓 명은 되는 등장인물을 모두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관객과 무릎을 맞댈 정도로 가까운 소극장에서 지루하지 않게, 90여 분 러닝타임을 혼자 책임진다는 압박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악몽도 많이 꾸었다. 다음 장면 대사가 기억나지 않아 공포심에 눈을 뜨면 새벽이다. 다시 대본을 잡고 외우고 또 외워 자다가도 줄줄 터져 나오게 했다.

방황과 자괴감의 굽이 굽이를 수없이 반복하며 탄생한 최정원의 1인극 <지킬앤하이드>는 호평 일색이다. 90분간 두 손을 모으고 감동하며 봤다는 리뷰도 많다. 의표를 찌르는 서늘한 어터슨은 최정원을 통하면서 응원과 위로가 더해져 복합적인 캐릭터로 거듭났다. 이번에도 ‘최정원은 최정원했다’. 그가 최근 참여한 초연 작품들은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컴 프롬 어웨이>, <멤피스>, <프리다>, <고스트>, <마틸다> 등이다. 대표작으로 25년간 전 시즌 참여 중인 <시카고>와 20년 가까운 <맘마미아>는 말할 것도 없다. ‘최정원이 출연한 작품을 나열하면 그대로 한국 뮤지컬 흥행의 역사’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4명의 더블 캐스트와 공동창작

그런 그가 21년 만에 도전한 1인극 <지킬앤하이드>는 특별했다. 함께한 배우들이 너무 좋았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컬배우 고훈정, 연극배우 백석광, 드라마에서도 주목받는 강기둥과 대본 분석하는 나날은 행복 그 자체였다. 배울 게 많은 배우들이라 매일 자극이 됐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이준우 연출과 함께 4명의 출연진은 한 달 동안 매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본 분석을 치밀하게 했다. 공동 창작자로서 아이디어를 나누며 세계관을 함께 구축했다. 배우들의 캐릭터가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이준우 연출의 도움이 컸다. “처음에는 여러 시도를 하느라 매번 다른 해석을 했어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어터슨은 아예 처음부터 못 되게 했죠. 남자처럼 하기도 했는데 이준우 연출이 최정원 자신으로 시작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지금 공연의 첫 장면이 그렇게 완성됐습니다”라고 부연한 최정원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관객들이 더 좋아해 줘 안착할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배우 최정원은 연극 <지킬앤하이드>에서 1인다역으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을 섬뜩하고 애잔하게 표현했다. /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배우 최정원은 연극 <지킬앤하이드>에서 1인다역으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을 섬뜩하고 애잔하게 표현했다. /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젠더프리 캐릭터는 연극 <지킬앤하이드>가 두 번째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 남자배우의 전유물이었던 헤르메스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주는 최정원 헤르메스는 요즘 청년 세대가 갈망하는 이상향 멘토로 자리매김했다. 전혀 다른 캐릭터인데 <지킬앤하이드>의 어터슨에게도 관객들은 위로 아닌 위로를 받는다. 작품을 여는 “아마 저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제가 좀 호감형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대사와 작품을 닫는 “그게 바로 자네의 하이드야, 어터슨. 그게 자네 안의 괴물이라고”라는 대사가 배우 최정원을 거치면서 공포와 질책보다는 악이 횡횡한 이중적 세상에서도 노력하면 선(善)함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응원으로 들린다. 같은 작품에 전혀 다른 해석이다.

청년들에게 “너는 특별하다”는 희망 주고 싶어

“공연 시작 직전 5분이 너무 행복합니다. 연습한 만큼 언제나 처음처럼 저만의 5분 명상을 하죠. 할 수 있다, 내 어머니가 내 안에 있다, 어디선가 나를 위해 뭔가 해주는 팬들도 생각합니다. 그러면 두렵고 무섭던 마음도 겸손해지고 따뜻해져요. 아름다워지는 스스로를 느끼면 막이 시작되고, 그다음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날 관객들의 분위기에 따라 매번 달라지니까요”라고 공연에 임하는 자세를 전하는 최정원은 “모든 선은 여유에서 온다”고 강조한다. 급하거나 뒤따라가거나 바쁠 때 나올 수 있는 게 ‘악’ 이다. 바쁘면 서두르게 되고 우연히 부딪히는 사람에게도 화내게 마련이다. “선과 악은 누굴 때리고 기부하고 해서 나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시간을 여유롭게 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선이 생겨나지요. 공연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여유 있으려면 남들 100번 할 때 1000번 연습합니다”라고 평생 지킨 삶의 태도를 전한다.

“뮤지컬계 마틸다가 되고 싶어요. 마틸다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캐릭터거든요. 내 양심에 당당한, 내가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푸는 그 순간 부자가 됨을 깨닫게 하지요”라며 “나에게 마틸다처럼 초능력이 있다면 바로 연기잖아요. 연기로 관객들 상처를 치유하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또 “이제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따뜻하게, 너는 특별하단다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있는 한국 학생들에게 말이죠. 다 뛰어난 아이들인데, 어른들이 마음은 갖고 있는데 표현을 못 해서 세대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라고 했다. 그는 최근 본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과 영화 <서브스턴스>, <콘클라베> 등에서 연극 <지킬앤하이드>와 같은 맥락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많은 사유를 할 수 있었고, 그 대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장 자기만의 방법으로 실천 중이다. 연극 <지킬앤하이드> 공연이 끝나고 ‘퇴근길’ 행사를 한다. 출연 배우들이 공연장에서 퇴근하며 관객들과 눈인사를 나누거나 악수를 하는 이벤트다. 대극장 공연에서는 대규모라 못 했지만, 대학로에서는 충분히 모든 관객과 눈빛을 나눌 수 있어 강행했단다. 첫 공연날부터 하고 있는 퇴근길 이벤트를 통해 최정원은 관객들과 작품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 학생들을 포옹해주기도 한다. 그러면 서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뮤지컬만 봤던 팬들이 이 연극에 감동받아 다른 대학로 연극도 예매해서 본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개인적으로 너무나 행복하단다.

“최근 영화 <승부>를 봤는데 ‘바둑을 다 놓고 나면 아, 이렇게 놓을 수 있구나 알겠는데 놓기 전에는 안 보인다’는 대사가 마음에 깊이 와닿았어요. 내 모든 공연이 그러했으니까요.” 36년차 배우 최정원은 한국 뮤지컬계의 ‘장르’이자 ‘품격’이다. ‘최정원한다’는 표현은 방황과 고민의 터널을 열심히 통과해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쏟아내는, 늘 에너지를 완충해 주위 동료들에게 온기와 밝은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의미다. <시카고>와 <맘마미아> 등의 제작사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는 최정원 배우의 이런 기질을 ‘해님’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뮤지컬계는 물론이고 동시대 청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햇살이 되는 순간을 고대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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