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일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장제원 전 의원 빈소 앞에 조화가 줄지어 서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 혐의로 고소돼 경찰 수사를 받고 있던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3월 31일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가 고민 끝에 9년 만에 형사고소를 한 이후였다. 장 전 의원의 죽음을 두고 여권에선 “그는 이미 죽음으로 그 업보를 감당했기에 누군가는 정치인 장제원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를 해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하태경 전 국민의힘 의원)거나,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윤석열 대통령)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
피의자의 죽음이 권력형 성폭력의 면죄부가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발언들로 해석된다. 정치권의 ‘애도사’에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데자뷔로 보인다. 사망한 박 전 시장을 조문한 이해찬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고인에 대한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당 차원에서 대응할 계획이 있느냐”고 질문한 기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하는 것인가. XX자식”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박 전 시장 사망 이후에도 지속적인 2차 가해에 시달렸다.
어떤 죽음은 ‘폭력’이 된다. 권력형 성폭력 피의자의 자살은, 피해자의 회복할 권리를 박탈한다. 피의자의 진정한 사과를 받는 일도 요원해진다. 가해자가 죽어도 그의 권력은 남아 끈질기게 피해자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피해를 ‘피해’로 보지 않고 ‘진영 논리’를 앞세워 피해자의 법적 조치를 정파적으로 해석하는 등 2차 가해를 지속하는 것이다. 피의자가 스스로 택한 죽음의 원인을 피해자와 연결 지어 책임을 돌리는 행태도 이어진다. 특히 가해자가 정치인 등 권력자일 때 이 같은 현상이 극심한데, 가해자의 죽음 이후엔 2차 가해가 더해지는 경향이 있다.
권력형 성폭력 피의자의 죽음이 애도로만 뒤덮여선 안 된다. 현실을 살아갈 피해자에게 남은 것이 공동체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사건은 피의자의 사망 이후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 수순을 밟는다. 사건을 접는 것만이 살아남은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선택지가 돼선 안 된다. 가해자가 사망해도 실체가 규명될 수 있도록 법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사건을 일정 부분이나마 매듭지을 공식적 판단이 있어야 피해자의 권리 회복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고인이 된 피의자의 치적을 읊는 정치인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남긴 폐해를 동시에 짚어야 한다.
박 전 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책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저에게는 잊힐 권리보다 ‘제대로 기억될 권리’가 먼저 회복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제대로 기억돼야, 제대로 잊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해자 애도가 아닌 피해자의 회복과 평안을 기원하고 싶다. “가해자의 인권은 성폭력 가해 용의자가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피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권력은 아니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은 사법권을 가진 국가를 상대로 주장돼야지, 피해자를 상대로 경합할 수 없다는 당연한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