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5일 경북 안동시로 진입하는 도로 앞 야산이 불타고 있다. 성동훈 기자
산에 봄이 찾아왔다. 얼었던 흙은 스며드는 햇볕에 녹아내리고,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낮게 웅크렸던 나뭇가지들도 생기를 되찾아 연둣빛 새순을 틔우기 시작했다. 진달래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산길을 따라 오르면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겨우내 잠잠했던 새들은 다시 지저귀며 숲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번 3월의 산은 달랐다. 푸르러야 할 능선이 붉은 화염에 휩싸였고, 연기가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영남·충청·호남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은 건조한 날씨와 강풍을 타고 무섭게 번져나갔다. 주민들은 집을 등지고 대피소로 몰려들었고, 소방 헬기와 진화대원들이 연기 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불길은 도로를 집어삼키고 마을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3월 29일 기준으로 산불은 30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2025년 3월 국내에서 발생한 산불은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이자 가장 큰 피해를 남긴 산불이라고 분석된다.
기후변화로 가뭄이 길어지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산불의 규모와 빈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겨울, 예상보다 따뜻한 날씨와 극심한 건조가 이어지면서 산림은 작은 불씨에도 무너질 준비가 돼 있었다. 불씨 하나로 터질 준비가 된 화약고 같았다. 이러한 산불 재앙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광역권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했던 캘리포니아 산불처럼 세계 곳곳에서 이상고온과 극단적 기상 현상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세계기상기구(WMO) 보고서는 이를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임을 경고하고 있다. 2024년, 지구는 기록상 가장 뜨거운 해를 맞이했다.
2024년, 지구 평균기온 1.55도 상승
WMO가 3월 19일 공개한 지구 기후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약 1.55도 상승했다. 175년간의 관측 기록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서 산업화 이전보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2도 밑으로 유지하며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 제한선이 지난해 깨졌다.
지구 평균기온이 오른 것은 온실가스 농도가 올랐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지난 175년 관측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최소 200만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메탄과 아산화질소의 농도 역시 최소 80만년 동안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생 인류는 약 30만년 전에 등장했기 때문에 이처럼 온실가스로 가득 찬 대기를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문제는 대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후변화의 주요 지표인 해양 온난화는 특히 두드러진다. 지금까지 해양은 온실가스로 인해 갇힌 추가 열기의 약 90%를 흡수했는데, 2024년 바닷속 열에너지 총량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동시에 대기에 증가한 이산화탄소 농도는 해수에 흡수돼 바닷물의 pH(수소이온농도)가 낮아지는 해양 산성화를 일으킨다. 바닷물이 점차 ‘탄산수’로 변해간다. 해양 온도 상승과 산성화는 해양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다. 2024년 4월까지 전 세계 모든 해양의 온대 산호가 백화 현상을 겪었다. 바다 온도가 오르며 해수면 상승도 빨라졌다. 북극 해빙의 면적은 지난 18년간 역대 최저 기록을 매년 새로 썼고, 남극 해빙도 지난 3년간 최저 기록을 경신해왔다.
기후변화는 이미 인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WMO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열대성 사이클론, 홍수, 가뭄 등의 영향으로 80만명 이상이 피해를 보았다. 이는 2008년 이후 연간 피해 규모로 보면 가장 높은 수치다. 식량위기가 악화한 나라도 18개에 이른다.

지난 3월 25일 경북 안동시 외곽도로의 야산으로 산불이 번지고 있다. 성동훈 기자
트럼프 2기의 화석연료 정책 강화
WMO 보고서는 기후 대응 강화를 촉구했지만, 국제사회의 대응은 오히려 균열을 보인다. 온실가스 감축은 난항을 겪고 있으며, 세계 기후 대응 공조 체제는 위기에 직면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정책 변화는 국제사회의 기후 대응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기후위기를 “녹색 신종 사기(Green New Scam)”라고 규정하며, 집권 후 파리기후협약을 다시 탈퇴했다. 이로써 미국은 이란, 리비아, 예멘과 함께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가 됐고, 국제사회의 기후 리더십에 공백이 생겼다.
트럼프 1기에서도 그는 오바마 행정부가 가입했던 파리협약을 탈퇴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취임과 동시에 재가입하며 친환경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시행된 4300억달러 규모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차 보급을 지원하는 핵심 법안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을 대폭 철회하고,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정책으로 전환했다. “Drill, Baby, Drill(석유를 뚫어라)”이라는 구호처럼 트럼프 행정부는 화석연료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IRA는 폐지를 검토 중이며, 연방정부 건물 내 전기차 충전소도 전면 폐쇄할 계획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 작업에서 미국 정부 소속 과학자들의 참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최근 환경보호청(EPA)은 바이든 대통령의 ‘그린 뉴딜’ 정책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며, 승용차 배출가스 규제 기준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미 기상·기후 감시 기관인 해양대기청(NOAA)에서는 1300명의 인력을 감축했으며, 추가 감축도 검토 중이다.
3월의 산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재로 덮여갔다. 가장 푸르러야 할 숲이 불길에 휩싸이고, 가장 싱그러워야 할 공기가 탄 냄새로 가득 찼다. 지구는 더 뜨거워졌고, WMO의 경고는 날카롭게 울려 퍼지지만 세계는 분열돼가고 있다.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려는 ‘변화의 힘’과 산업혁명 시대의 유산을 붙잡는 ‘저항의 힘’이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인류는 익숙한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는 그 틈새마다 불길을 키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지만, 그 길은 험난하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역사는 언제나 조금씩,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인류는 늘 늦었고, 때로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느리게 움직였다. 산업혁명도, 민주주의도, 여권 신장도-한때는 불가능해 보였고, 수많은 퇴보의 순간을 겪었지만-인류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의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비록 더딘 걸음이지만, 불타는 3월의 산을 다시 푸르게 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날이 올 것을 믿는다.
<정봉석 JBS 수환경 R&C 대표·부산대 환경공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