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스님과 목사가 아웅다웅 장난치는 영상을 보면서 생각한다. 종교전쟁 중이었다면 저들의 우정이 가능했을까. 민주주의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운 끝에 맺어진 평화협정이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대체로 그런 것들이다. 종교전쟁, 이념전쟁, 계급전쟁…. 피 흘리며 싸우다 지쳐 서로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때 관용의 정신이 등장했다. 관용이란 본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게 하는 것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관용할 수는 없다.
근래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극우세력의 발호는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가꿔왔던 관용의 정신에 혼란을 일으켰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의 정신은 가능한가. 이토록 나의 존재를 적대하는 사람과 같은 지구를 공유할 수 있을까.
‘탄핵 불복’을 주장하는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는 최근 절친했던 친구가 자기더러 ‘쓰레기’라고 말하고 인연을 끊었다며 인간관계의 고통을 호소했다. 전씨는 연일 상대 진영을 증오하는 발언으로 매스컴을 타면서 ‘극우의 아이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광장에 나타난 극우세력을 일종의 증오공동체로 이해한다. 누군가를 증오하기로 약속된 이들 집단 내에서 상대와 화해하거나 상대를 이해하는 행위는 계약 위반이다. 외롭고 고립된 개인들에게 통일된 정념에 기반한 증오공동체는 유대감을 제공하는 온실이 된다. 여기서 가장 환영받는 스타는 증오의 논리를 제공해주는 사람들, 유튜버와 정치인들이다. 광장에 등장한 전씨는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환대를 맛보았다. 진실은 늘 의심스럽지만, 이 뜨거운 환대는 의심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정치팬덤을 파악하려면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획득되는 따뜻함에 관해 이해해야 한다.
나는 광장에 나타난 극우세력을 일종의 증오공동체로 이해한다. 외롭고 고립된 개인들에게 통일된 정념에 기반한 증오공동체는 유대감을 제공하는 온실이 된다. 여기서 가장 환영받는 스타는 증오의 논리를 제공해주는 사람들, 유튜버와 정치인들이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우정을 쌓기가 어려운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관용을 말하면 따분한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증오하기로 하면 수많은 ‘친구’가 한꺼번에 생기니 말이다. 정치적 증오의 격화는 그 사람의 사소한 정체성에 관해 과장된 생각을 품게 만든다. ‘XXX 지지자’는 다른 존재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그 사람의 일부에 불과한 정념을 그의 전체라고 생각하게끔 한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내가 본 그 사람의 진실은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확신에 찬 ‘XX주의자’라도 오직 ‘XX주의’로만 이루어진 인간은 없으며, 가장 열렬한 ‘XXX 지지자’조차 오로지 그에 대한 지지로만 구성된 인간은 아니다. 누군가를 하나의 돌출된 정체성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는 인간 각각이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나는 근래 한국사회에 나타난 많은 불안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치가 얼마나 쓸데없는 격분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