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양성과 관용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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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성애자의 도시’답게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들을 위한 LBGT센터가 여러개 있다. 손호철 제공

‘미국 동성애자의 도시’답게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들을 위한 LBGT센터가 여러개 있다.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꼭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북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는 골든게이트 다리를 건너며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흥얼거렸다. 1967년 발표된 이 노래는 샌프란시스코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특징인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를 대표한다.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한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은 1970년 우드스톡축제다. 하지만 우드스톡 이전에 샌프란시스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사랑의 여름’이라는 축제다. 기존의 고루한 남녀관을 혁명적으로 파괴하는 ‘프리섹스’, ‘꽃의 힘(flower Power)’, ‘폭력과 징집 중단’을 내걸고 미국 전역에서 10만명의 ‘꽃아이들’(flower children)이라 불린 젊은이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다.

‘헤이트 애시베리.’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있는 헤이트 거리와 애시베리 거리의 교차점에 서자 전설적인 거리 팻말이 나타났다. 이 지역에는 1960년대 들어 전후 비트세대 문학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과 풍요로운 소비주의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자본주의와 주류 문화에 저항해 유희와 쾌락, 마약, 공동체를 강조하며 ‘체제 밖’으로 나가(drop out) 일과 소비를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는 히피문화를 주도했다. 한 지역 히피신문은 1967년 베트남전쟁 징집 분위기에서 “인간의 저 아래 속에 묻어두었던 ‘축제’라는 개념을 끌어내 의식화하고 공유해 연민과 깨달음, 사랑의 르네상스를 통해 모든 인류가 통합되는 혁명을 이뤄야 한다”며 ‘사랑의 축제’를 제안했다. 대안에 목말랐던 젊은이들은 헤이트 애시베리로 몰려들었다.

1967년 수많은 젊은이가 지미 헨드릭스 등의 공연에 열광했던 골든게이트 공원에 안개가 끼어 있다. 손호철 제공

1967년 수많은 젊은이가 지미 헨드릭스 등의 공연에 열광했던 골든게이트 공원에 안개가 끼어 있다. 손호철 제공

골드러시가 낳은 ‘동성애자의 메카’

‘사랑은 인권이다.’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를 걷다가 이 구호를 보자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같이 놀랐다. 대학에서 ‘인권의 정치’도 가르쳤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구호다. 사방에 동성애자와 무지개연합을 상징하는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간판과 벽화가 가득했다. ‘흑인,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이민자, 장애인, 병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라는 구호 등 거리는 시장 만능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과 달리 최소한 문화적으로는 해방된 ‘문화해방구’였다. 커피점 상호마저 <민중에게 커피를(Coffee to the People)>이다.

1967년 이곳에 모였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걷자 ‘평화, 1967, 사랑의 여름’이라는 그림이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가 내 손을 끌고 따라오란다. 스타킹을 신은 ‘야한’, 거대한 여자 다리 모형을 2층 베란다에 도발적으로 설치해 놓은 건물이 나타났다. 한국 같으면 ‘19금’에 걸려 당장 강제로 철거했을 건축물이다. 조금 더 가자 한 건물 옆 벽에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연주하는 그림이 나타났다. “여기가 내 애인인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이에요.” 설마 진짜 애인이랴만, 고마운 할머니 덕분에 지미 헨드릭스의 집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랑의 축제가 여기서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는 항구도시답게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대비 동성애자가 15.4%로 미국에서 제일 많은 ‘게이의 도시’, ‘동성애자들의 메카’로 불릴 만큼 다양성과 관용,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다. 세계적으로 동성애자 비율이 약 3%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평균의 5배, 시민 7명 중 한 명이 동성애자라는 뜻이다.

“아니 골드러시와 동성애가 무슨 관계가 있어?” 이 지역 동성애의 뿌리를 골드러시에서 찾은 한 교수의 글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글을 읽자 이해가 됐다. 골드러시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서 샌프란시스코가 다양성과 관용의 도시로 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여성은 드물었기 때문에 동성애가 퍼지기에 좋았다. 두 번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으로 징집병사가 급증했고, 미국 정부는 이들 중 동성애자를 가려 강제 전역시켰다. 문제는 해군이었다. 해군에서 적발된 동성애자들은 샌프란스시코항에 내리게 했다. 자연히 지역에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났고,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조직이 생겨났다.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 / 손호철 제공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 / 손호철 제공

그때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반자본’ 실천할까

결정적 계기는 호세 세리아가 1961년 미국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공직(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출마한 것이다. 그는 선거에서 예상외로 6000표나 얻었다. “그날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마하는 사람은 게이커뮤니티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리아의 증언이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만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들도 커밍아웃하고 조직화를 시작했다. 1977년 처음으로 동성애자가 시의원에 당선됐다. 동성애자들의 힘이 강해지자 시는 친동성애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동성애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힘은 더 강해졌다. 일종의 ‘눈 굴리기 효과’가 나타났다.

위기도 있었다. 1980~1990년대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위기다. 이후 15년 동안 지역에서 15만명이 AIDS로 죽었다. 이 같은 위기 속에도 동성애운동은 지속돼 2004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애자 부부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했다. 동성애자 결혼은 많은 법적 논쟁을 낳다가 201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최종적으로 합법화됐다.

한국이라면 당장 철거했을 법한 ‘19금’ 외관의 건물 / 손호철 제공

한국이라면 당장 철거했을 법한 ‘19금’ 외관의 건물 / 손호철 제공

게이 거리로 알려진 카스트로 거리 가까운 곳에 샌프란시스코 LBGT센터가 있다. 건물 전체를 이들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칠한 것, ‘즐거움(Joy)은 우리들의 집단적 힘의 연료다’, ‘레즈비언, 양성애자, 게이, 성전환자’라고 써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쯤이나 성적 정체성이 다른 LBGT가 이같이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살 수 있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헤이 조-” 지미 헨드릭스가 이빨로 기타 줄을 물어뜯는 특유의 연주법으로 히트곡인 ‘헤이 조’를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텅 빈 골든게이트 공원 잔디밭에 서자 58년 전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들으며 열광했던 수만명의 젊은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근 60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 젊은이들은 대부분 70대 후반의 노인이 됐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얼마나 그때의 열정을 유지하며 ‘반자본주의’, ‘반소비주의’를 실천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화려한 외관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화려한 외관 / 손호철 제공

한 건물에 ‘1967년 사랑의 여름’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손호철 제공

한 건물에 ‘1967년 사랑의 여름’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손호철 제공

지금도 ‘문화해방구’인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표지판 / 손호철 제공

지금도 ‘문화해방구’인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표지판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의 한 가게에 ‘사랑은 인권이다’라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의 한 가게에 ‘사랑은 인권이다’라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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