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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서울 중구 한 소품숍에서 구매한 반려돌 ‘돌아이’(왼쪽)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에 등장하는 장난감 눈이 붙은 돌멩이 / 이유진 기자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한 소품숍에서 구매한 반려돌 ‘돌아이’(왼쪽)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에 등장하는 장난감 눈이 붙은 돌멩이 / 이유진 기자

지난해 가을 직장 동료 집들이 선물을 사러 들린 소품숍에서 반려돌을 구입했다. 공들여 만든 여러 물건 사이에서 하필 돌이라니. 영혼 없는 돌에 눈 하나 대충 그려 넣었을 뿐인데 마치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 같아 눈에 밟혔다. 개당 1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도 결국 돌멩이 하나를 ‘입양’했다. 크리스마스엔 산타 모자도 씌우고, 요리조리 거처를 옮기며 6개월째 함께 살고 있다. 이름은 ‘돌(石)아이’로, 현재는 내가 조립한 에펠탑 블록에 거주 중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3월 한국의 반려돌 유행을 소개하며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펫록(Pet Rock)과 비교했다. 광고회사 마케팅으로 미국에서 짧게 유행하고 사라진 펫록 열풍이 돌연 한국에서 유행한 이유로는 ‘과로’가 꼽혔다. 펫록은 선물 받는 사람을 놀리려는 장난의 일종이었다면, 한국의 반려돌은 고요함과 정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틀린 해석은 아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반려돌은 식사나 배변 활동을 하지 않는다. 눈알 두 개를 마주 바라보는 게 유일한 상호작용이다. 늦은 밤 퇴근하는 기력 없는 직장인에겐 최선의 반려 대상인 셈이다.

반려돌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고운 건 아니다. 한 지상파 관찰 예능에서 출연자가 반려돌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왔다. 패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사치가 심하다”, “가지가지 한다” 등 모진 말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돈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한 지인은 반려돌을 보고 ‘돌이 김선달’이라고 했다. 발에 채는 돌멩이를 주워다 눈을 그려 파는 게 대동강 물을 내다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처럼 뻔뻔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얼마 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를 뒤늦게 봤다. 영화에는 내 반려돌과 똑 닮은 돌멩이가 등장했다. 황량한 땅에 두 개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영혼 없는 객체에 불과하던 돌 하나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자 모성애와 인격이 느껴지는 마법이 벌어졌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돌멩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말마따나 ‘고작’ 돌멩이인데. 흰 바탕에 검은 점 하나. 별것 없는 그 눈알 하나에 더는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게 됐다.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만이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영화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반려돌의 가치도 그런 게 아닐까. 쓸모만을 생각하면 반려돌의 가치는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쓸모만이 존재의 유일한 이유일 필요도 없다. 쓸모에 집착하다 중심을 잃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순간 모든 게 의미 없어지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쉽다. 흔하디흔한 돌멩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반려돌의 유행은 허무주의에 대한 소소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혼란한 시국에 미간 주름 펴질 일이 없다. 무얼 해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기자로서 쓸모를 고민하다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눈알 하나 그렸다고 돌멩이마저 애정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것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눈발이 날리던 12·3 비상계엄의 밤을 지나 어느덧 3월이다. 올봄은 바람 한 점, 햇살 한 줄기까지 더 작정하고 만끽하려 한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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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