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사베이
윤석열 정부와 트럼프 정부가 보여주는 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대규모 연구개발비 삭감이다. 지나친 억측은 삼가야겠지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지도자들은 대부분 과학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고, 따라서 과학에 대한 지원을 축소한다. 어쩌면 과학이야말로 이 처참한 비상식에 대한 유일한 구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과 한국에서 과학은 유린당하고 있다.
학술지 판타지의 붕괴와 한국연구재단 권력의 역설
2023년 한 해 동안 한국 연구계는 단 한 곳의 해적 학술지에 10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출판료를 세금으로 지불했다. 한국건설연구원의 경우 전체 논문 43.5%가 부실 학술지에 게재되는 충격적 기록을 세웠다. 이는 단순한 예산 누수 이상의 문제다. 연구자들이 ‘학술지 유통마진’에 목을 매는 구조가 고착화됐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10년 전 가짜학회 스캔들이 재현된 이 현상은 연구계 내부의 자기검열 메커니즘마저 실패했음을 방증한다.
한국연구재단(NRF)은 연구자들의 목줄을 쥔 과학계의 절대권력이다. 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독점적 지위에서 탄생한 이 ‘학술 카르텔’은 부실 학술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부실 학술지에 1000억원의 혈세가 유입된 사건은 한국연구재단의 시스템적 무능력이 빚은 참사다. 한국연구재단이 학술지 품질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제재 메커니즘을 가동했다면, 한국건설연구원의 논문 43.5%가 부실지에 게재되는 치욕은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은 최근 부실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부실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기관들이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과학계에서 부실 학술지 논란은 이미 10년 전부터 지속돼왔지만, 한국연구재단은 이제야 뒷북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수조원의 연구비를 관리하는 국가기관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2021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학술포럼은 이 문제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2021년 11월, KISTI는 ‘오픈 사이언스 시대, 부실 학술출판의 쟁점과 대응방안’이라는 주제로 건전학술활동포럼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국회의원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이 참석했고, 부실 학술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MDPI 출판사의 출판윤리 담당자가 주제 발표를 했다. 이 행사는 MDPI를 비판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MDPI를 오픈 액세스 출판의 선두주자로 홍보하는 자리로 변질됐다. 결국 2024년 3월 MDPI는 한국에 지사를 열고 본격적으로 진출했고, 국민 세금 1000억원이 이 출판사로 흘러 들어갔다. 한국연구재단은 이 모든 과정에서 침묵의 공모자 역할을 자처했다.
관료주의: 과학을 죽이는 최악의 바이러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 관료와 정치인들은 대형 행사를 열어야만 연구 역량이 발전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착각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제 중국의 딥러닝 기술을 바라보며 황망해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 2위를 다투는 연구개발비를 투자했음에도 한국은 인공지능 혁명은커녕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딥러닝 기술을 개발하자, 국회의원들은 급히 한국의 인공지능 연구 역량을 키우기 위한 행사를 열고 있다. 과학기술 관료들은 정치인들과 여론의 눈치만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폐쇄적인 연구 환경도 큰 문제다. 외국 명문대에서 한국 대학으로 이적한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국제협력 과제 공지가 한글로만 이루어져 해외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연구 환경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국제 교류를 고려하지 않고 유지돼왔다. 일본과 중국조차 이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한국연구재단은 관료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어 연구 현장의 요구와 연구 환경의 발전을 위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웹사이트가 1990년대 은행 송금 인터페이스 수준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과학자에 대한 기본적 불신이 시스템으로 굳어진 결과다. 공인인증서와 각종 서류 심사의 늪 속에서 창의성은 질식당한다. GPU(그래픽처리장치) 구입에 3년이 소요되는 시스템에서 AI 혁명을 논하는 것은 공상과학에 가깝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과학계 마피아’는 허구가 아니다. 연구비 배분 구조 자체가 특정 이익집단의 유착을 조장하는 구조적 문제를 가진다.
해법은 간단하다: 논문 중심 평가체계 구축
그렇다면 무엇부터 혁신해야 할까? 적어도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연구논문의 출판을 기준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연구자에 대한 평가는 거의 100% 연구논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구비 심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연구자가 출판한 논문의 질과 양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연구비를 지원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논문을 제대로 심사할 수 있는 평가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현재처럼 숫자와 형식만 맞춘 심사가 아니라 연구자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 풀을 확보하고, 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구비 심사는 결코 공정할 수 없다. 다양한 이익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이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논문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연구재단은 학술출판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연구개발비가 낭비되는 것을 막는 첫걸음이다. 연구비 심사가 아니라 출판된 논문에 대한 심사가 공정해야 한다. 이는 모든 과학자가 공감하는 사실이다. 한국연구재단만이 이를 모르고 있다.
과학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스템으로
2025년 현재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세계 5위지만, 노벨상 후보자는커녕 국제학회 주도권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는 기초과학 붕괴의 직접적 결과다. 관료주의라는 거대한 기생충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혁신이 불가능하다.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발견의 환호를 지를 때, 옆방에서 서류 정리에 허덕이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 학술출판 시스템 개혁은 이 긴 여정의 첫걸음이다. 논문 한 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사회에서만 진정한 과학혁명이 탄생한다. 이제 한국 과학계는 혁명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관료주의라는 거대한 기생충을 제거할 때만 진정한 과학혁명이 시작된다. 연구자의 창의성이 서류철 사이에 묻히지 않도록, 이제 과학기술계에는 체제 전복적 혁명이 필요하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