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7세 고시’에 노동법을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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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최근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 올라온 <휴먼페이크다큐 자식이 좋다>에서 ‘Jamie(제이미)’ 엄마(개그우먼 이수지 분)는 자녀의 배변 훈련 성공 소식에도 눈물 글썽이며 “투 섬즈 업!(Two thumbs up)”을 외치고, 넷플릭스 드라마에 제기차기가 나왔다며 제기차기 과외까지 알아봅니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네 살배기 아이를 위해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이 엄마의 모습은 재미있지만, 우리 교육의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이른바 ‘7세 고시’는 대치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이 7세가 되는 해 가을쯤부터 영어학원 ‘톱 3’의 입학 테스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입시지옥 커리큘럼에서 정작 살면서 가장 중요하지만 빠져 있는 과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노동법 교육입니다.

만 15세만 넘으면 법적으로 일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청소년이 편의점이나 카페 아르바이트 등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해 평생을 혹은 인생의 상당 기간에서 근로소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이들에게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신병이 총 쏘는 법도 못 배우고 전쟁터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어깨 너머로 겨우 노동법을 배우며 억울함을 달랠 뿐입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사장님이 (전화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라고 해 부당해고로 큰돈을 물어주거나, “연장근로수당을 왜 줘야 하냐”라고 해 임금 체불로 전과자가 됩니다. 근로자 입장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모릅니다. 노동법에 쓰여 있어도, 그 법을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로 키운 수재들이 정작 노동 현장에서는 법 위반자가 되거나 법적 문맹이 돼버리는 셈입니다.

4% 노동법 교육 현실

노동법 지식 부족은 청소년 문제가 아닙니다.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들조차 노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법률가가 되는 방법은 변호사시험이고, 예전에는 사법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은 노동법이 헌법, 민법, 형법 같은 필수과목이 아니고 선택과목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많은 법학도가 노동법을 아예 건너뛰고 졸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국제거래 계약서와 인수·합병(M&A) 과정을 기가 막히게 검토하고, 무거운 형사사건을 멋지게 변호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근로계약서에서 연장근로수당을 쓰기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에 의하면, 로스쿨 내 노동법 과목 수강생은 학기마다 차이는 있지만, 정원 100명 중 10% 이내라고 합니다. 이마저도 상대평가 완화 기준에 맞춰 유지될 뿐 노동법을 배우려는 학생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법무부가 밝힌 최근 6년간 변호사시험 선택과목 응시자 현황을 보더라도, 선택법 7과목 중 노동법 선택자는 4%에 불과했습니다. 국제거래법, 환경법, 국제법 선택 비율은 82.5%였습니다. 노동법은 판례도 많고 공부할 게 많아, 변호사시험 응시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도 변호사시험에서 노동법이 외면받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노동법은 통상임금, 근로시간, 해고 등의 개념이 복잡하고 집단법과 개별법이 나뉘어 있어 부담스러워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강의 수강자도 적다 보니 노동법 교수 채용으로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법학자는 점점 줄어들고, 노동법 연구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우려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실무에서는 노동법 이슈가 가장 많다는 점을 학생들은 졸업 후에야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노동법을 공부하고 들어온 변호사가 갈수록 줄어들다 보니 로펌에서는 이들을 교육해 실전에 투입하기까지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한국경제 2023. 5. 28. 기사 노동법 모르는 노동팀 신입 변호사…로펌은 ‘골머리’).

박 교수는 “단지 노동자가 될 아이들만이 아니라 사업가가 될 아이에게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노동을 통해 생활을 유지해갈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노동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다른 공부할 것도 많지만, 노동법을 공부하게끔 유도하는 개선책이 필요합니다. 현실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노동법과 ‘다음 오요안나’를 위해

안타깝게도, 노동법을 몰랐거나 무시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모두가 뒤늦게 깨닫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MBC 기상캐스터로 일하던 고 오요안나 씨의 사례가 그랬습니다. 그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특수고용직인 골프장 캐디 사건에서 법의 보호를 인정한 판례가 있었습니다. 판결은 말합니다. “①골프장 캐디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지만, ②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는 반드시 근로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③특히 특수고용직에게도 역시 직장 내 괴롭힘을 하면 불법행위 책임을 질 수 있다. ④사업주인 골프장도 골프장 캐디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사용자책임을 부담한다”(대법원 2024다207558 확정: 노동법 새겨보기 37화 성공하면 특고, 실패하면 부당해고 아닙니까?).

프리랜서 기상캐스터, 뉴스앵커 등으로 근무하다가 계약 종료를 통보받은 사건에서도 ‘업무 제안이 모두 회사 측에서 이루어진 점, 정규직 아나운서와 유사한 업무를 수행한 점, 업무 수행에 있어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은 점, 근무 장소와 시간이 회사에 의해 정해진 점, 5년 이상 계속적으로 전속적 근무를 한 점’ 등을 이유로 부당해고를 인정하기도 했습니다(서울행정법원 2021구합89251: 확정). 즉 형식적으로 프리랜서라도 실질적으로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경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만약 고 오요안나 사건에서 ①회사가 위와 같은 판례 법리를 알고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직장 내 괴롭힘이 있는지 점검하고 지도했다면 ②선배가 노동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자중하고 조심했더라면 ③주변 사람들도 고인에게 노동 상담이나 노동청 방문을 권했다면 ④그래서 실제로 노동청이나 노동법 상담소로 발걸음을 돌렸더라면, 현재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전북 완주의 특성화고 애완동물학과에 재학 중이던 고3 홍수연 학생은 학교의 지시로 대기업 계열 콜센터에서 ‘해지방어’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과중한 스트레스와 감정노동에 시달렸고, 현장실습 중 저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23년 영화 <다음 소희>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정주리 감독은 말합니다. “무슨 일(해지방어)을 하는지도 모르고 보낸 학교가 노동법 교육을 하겠어요. 그런데 만약에 반드시 그런 교육을 받는다, 그게 완전히 제도적으로,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하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경향신문 2023. 4. 23: 영화 <다음 소희> 정주리 감독 “고등학생이 왜 그 일을…납득 안 됐죠”)

다음 소희, 다음 오요안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치가 있어야겠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노동법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근로계약서 쓰는 법,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의 의미, 부당해고나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을 때 대처 방법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권리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업주가 돼 노동법 위반으로 큰 손실을 보는 것을 막으려면 근로계약을 준수하는 방법,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하지 않는 방법, 부당해고를 하지 않는 방법은 결국 교육을 통해 미리 대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열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인 대한민국, 그 열정을 노동법 교육으로도 조금만 돌려보면 어떨까요. 이수지 씨가 연기한 제이미 엄마도 언젠가, “우리 아이, 근로계약서 스스로 잘 챙겼어요”라며 두 엄지를 치켜올리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한용현 변호사 lawyer_han@naver.com>

한용현의 노동법 새겨보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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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