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우리는 어떤 자유주의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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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사우스론에서 테슬라의 ‘모델 S’ 차량 운전석에 앉아 있다. 미국 정부효율부(DOGE)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사우스론에서 테슬라의 ‘모델 S’ 차량 운전석에 앉아 있다. 미국 정부효율부(DOGE)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그 가치에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자유의 개념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자유로움은 그가 속한 사회 내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유의 실체적 의미가 규정되므로 자유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보는 시각에 따라 매우 다른 내용을 가진다.

‘자유롭다’는 것은 일견 삶의 영역에서 외부적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의 도움을 얻어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또 다른 관점도 있다. 사회적 규범은 개인들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을 막아주면서 자유의 향유가 비로소 가능하도록 해준다. 국가나 법률이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해당한다.

트럼프 등장은 강자들 자유주의의 새 국면

자유에 대한 이 두 가지 관점은 공적인 토론의 장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경합하며 주도권을 다툰다.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해 사회적 안정을 해치기도 하고, 국가가 개인의 독자성을 제한해 다른 이들의 자유를 보호하기도 한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필수 불가결함을 세상에 각인시킨 프랑스 대혁명에서 자유는 평등, 박애와 함께 주창됐다. 지고의 가치인 자유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자유는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와 경합하므로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 즉 박애 정신이 바탕이 돼야 자유의 경합으로 사회가 파괴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로서 지금까지 강력하게 작용해왔다.

자유를 외부적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만 해석하려는 입장은 공론의 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현실에서의 힘은 강했다. 예컨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자산가들은 세금과 같은 사회적인 의무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치 세력은 이를 옹호해왔다. 이런 입장이 공론의 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로버트 노직 같은 자유지상주의 사회철학자들을 통해서였다.

하이에크는 법적 질서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할수록 사람들의 자기실현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자유를 국가 강제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정의했다. 노직 역시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능한 한 없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 입장이다. 이들은 개인의 삶과 자유와 소유권은 자연적인 권리로, 절대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며 사회로부터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자유주의의 이 분파는 개인의 초기자본(상속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기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재분배를 거부한다. 이들의 자유주의는 모든 이를 위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개인들의 자유 실현이 사회적 규범의 도움을 얻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사회적 안정과 지속성을 해치고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며 본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들의 자유주의는 부유하고 강한 자들을 위한 자유주의다. 이는 존 롤스가 말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든 이를 위한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강자들의 자유주의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위한 정책,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백인 서민층을 위한 정책을 표방하지만, 이는 정권 획득을 위한 레토릭일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부자들과 강자들을 위한 자유주의다. 부유한 이들이,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더 부유해질 수 있도록 모든 족쇄(규제와 법질서 그리고 국가의 공적인 체계)를 해체하겠다는 것이다.

강자들 자유주의는 파시스트적 사고로 귀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정권을 잡았고, 영국과 미국에서도 만연했던 파시스트적 정치사상은 강자들의 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공공투자를 통해 일자리도 만들었지만 다른 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비로소 독일 경제를 활성화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고통을 겪었고, 재벌들은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귄위주의적 통치체제로 전환시켰다.

트럼프의 부유한 친구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의 책사 스티브 배넌이 히틀러식 인사를 대중 앞에서 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머스크 소유의 소셜미디어 엑스가 가짜뉴스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마크 저커버그가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가짜뉴스를 검열하는 ‘팩트체킹(Fact-Checking)’ 기능을 없애겠다고 선언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은 뮌헨안보회의에서 나치를 옹호하는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독일 총선을 며칠 앞둔 상황이었다. 민주주의의 수호국이자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나라 미국. 그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팀원들이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마무리될 윤석열 정부의 행태가 트럼프가 보여주는 행보와 상당히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는 점도 흥미롭다. 첫 번째로 부유한 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이다. 다른 나라, 다른 시기의 보수 정부들과 비교했을 때 트럼프와 윤석열의 감세 정책은 강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자들에 대한 감세는 강자들의 자유주의의 특징이다. 두 번째로 이들은 지지자들의 의회 습격을 유도하고(트럼프), 계엄군을 국회 경내로 진입시키는(윤석열) 등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세 번째로 공공분야 종사자를 대폭 해고하고(트럼프), 주 52시간 제도를 무력화하는(윤석열) 등 반노동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들이 동류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강자들의 자유주의는 파시스트적 사고로 귀결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페이크(가짜) 자유주의’다. 윤석열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사실은 ‘권위주의자’, ‘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감세 정책은 결국 부유한 자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이에 동조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책과 우클릭은 민주당 지지자들에 대한, 그리고 당의 과거 약속과 현존하는 민주당 강령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다. 강자들의 자유주의, 파시스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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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