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계몽됐습니다(I’m Gyemo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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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측 대리인단 김계리 변호사가 탄핵심판 최종 변론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지난 2월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측 대리인단 김계리 변호사가 탄핵심판 최종 변론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아무래도 김계리 변호사는 내란 피의자 윤석열의 ‘X맨’이 분명했던 것 같다. 느닷없이 헌법재판관과 기싸움을 벌여 윤석열이 오히려 말리는가 하면, 지난 2월 25일 최종변론에서는 “저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강렬한 발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했다. 가히 이날 최고의 펀치라인이 아니었을까.

최대 피해자는 윤석열이다. 그는 최종변론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구치소에서 무려 77장의 원고를 썼고, 67분간 일장 연설을 하는 등 엄청 노력했다. 하지만 이른바 ‘어그로’에서는 김 변호사가 몇 수 앞섰다. 노래는 열심히 불렀는데 킬링파트는 남 줘버린 꼴이다. 정치권의 튀는 워딩을 사석에서 ‘밈’처럼 활용하는 이 업계에서도 김 변호사의 ‘I’m Gyemonged’는 오래 회자할 듯하다.

발언 자체도 강렬했지만 가장 큰 파괴력은 어긋난 ‘TPO’에 있었다. 계몽 선언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변호사의 변론이라기보다는, 열기 넘치는 대형교회 예배에서 들을 법한 간증의 언어였다. 떨리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종교적인 자리였다면 그의 말은 청중을 열광시켰겠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예배당이 아닌 법정이었고 대중은 열만 받았다.

그러나 김 변호사의 ‘신앙적 변론’은 한편으론 더없이 자연스럽기도 했다. 윤석열을 둘러싼 상황이 충분한 맥락을 보태줬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그 지지자들은 맹신적 믿음으로 서로 기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윤석열과 그 일당이 일방적으로 믿음을 악용한 쪽에 가깝겠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찾고 해답을 얻고 싶어한다. 종교, 예술, 학문, 정치, 사상 등은 그 기능을 갖고 있다. 고통의 이유를 찾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그 일은 너무 복잡하다. 자본주의화된 사회에서 그 일은 자주 무력해진다. 내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면 나를 둘러싼 체제를 들여다봐야 하는데, 다름 아닌 내가 그 체제의 일부이며 그 유지에 얼마간 기여해왔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일은 꽤 아프다. 이 모든 과정은 어렵고, 길고 적지 않은 용기를 요구한다.

많은 이가 지적했듯, 극우와 음모론은 늘 쉬운 해답을 제안한다. 오답이 늘 가장 명쾌한 모습으로 학생을 유혹하듯이. 극우는 고통의 원인을 구조가 아닌 타자(외국인·여성·장애인 등)에게서 찾는다. 좌표를 찍고 맹렬히 돌진하다 보면 복잡한 풍경은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음모론은 복잡한 상황을 깔끔히 정리한다. 선관위가, 대법원이, 전문가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거짓말’이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극우와 음모론의 엔진이 잘 굴러가려면 맹신적 믿음으로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켜야 한다. 윤석열과 그 일당이 틈날 때마다 맹신적 믿음을 부추기는 이유다. 그런데 사람들을 몽상에 빠트리는 이들은 주로 가장 현실적인 인간들이었다. 예를 들어 대규모 탄핵 반대 집회로 수익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윤석열이 궁지에 몰린 이 상황을 내심 누구보다 반길 수도 있다. 맹신적 팬덤정치의 수혜를 기꺼이 누렸던 몇몇 야권 인사에게는 이 아사리판의 책임이 없을까?

‘돈에 관심 없다는 사람을 조심하라, 그는 돈에 미친 사람이다’라는 오래된 인터넷 명언이 있다. 우리에게 계몽을 굳게 약속하는 이는 사실 우리를 수면마취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계몽은 회의를 전제한다. ‘계몽됐다는 믿음’은 형용모순이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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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