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는 비교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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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인류는 비교를 통해 생존하고 번성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보다 나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비교하면서 발전해왔다. 비교하기 위해 갈래를 나눴고, 이렇게 분류된 것에 서열을 매겨 나은 것을 선택했다. 서열은 또한 경쟁을 낳았고, 남보다 더 가지려는 경쟁은 발전의 촉매제가 됐다. 특히 우리나라는 비교에 민감하다. 타인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고, 남과 비교하는 걸 즐긴다. 친구 자녀와 자기 자식을 비교한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크기를 비교한다. 심지어 마트에 가서도 다른 사람의 카트를 유심히 본다.

비교의 폐해는 크다.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피폐해진다. 비교에서 오는 감정은 크게 세 가지다.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 우월의식과 교만함, 시기와 질투심이다. 이 모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뿐이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지옥이 된다.

우리는 평생을 비교의 재물로 살아

불만이란 감정도 비교에서 비롯한다. 직장 다닐 적에 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보다 일이 더 많은 게 늘 불만이었다. 비교하지 않으면 불만도 없다. <돈키호테>를 쓴 작가 세르반테스가 “더 좋은 상태를 안 보면 자기 상태에 만족할 수 있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비교는 갈등도 조장한다. 직장에서 인사평가를 받는 건 비교당하는 일이다.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 할 동료가 비교 대상이 되고, 이렇게 비교가 만연하면 관계가 좋을 수 없다. 비교는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인지상정이다.

비교는 남의 눈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비교할수록 남을 흉내 내고 대세를 따라가게 된다. 주변에서 성실성을 잣대로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 창의적인 사람도 어느덧 성실하게 보이고자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독창성은 사라진다.

우리는 이처럼 평생을 비교의 재물로 산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으로, 성인이 돼서는 일터와 보수로 비교한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로 비교하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들끼리 비교한다. 비교의 재단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내는 특이하다. 자신과 남을 견주지 않는다. 자기 생각하기도 바쁘다. 남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다. 나는 나고 남은 남이다. 자신이 비교 대상이 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아내는 비교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고 믿는다.

비교는 기준, 시점, 대상 측면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기준의 문제이다. 고교 시절 내내 의문이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과목을 기준으로 등수를 매기는 게 정당한가. 누구는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이 자신의 적성에 맞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더 잘할 수 있는 과목이 있을 텐데, 이런 맹목적인 비교는 부당하지 않은가. 적어도 공정하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직장 다닐 때도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실력도 있고 인간성도 좋은 사람과 실력도 없으면서 인간성까지 안 좋은 사람과의 비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실력은 좋지만 인간성이 나쁜 사람과 실력은 별로지만 인간성이 좋은 사람을 과연 비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축구 잘하는 사람과 농구 잘하는 사람을 모아놓고 어느 한 종목으로 경쟁시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시점의 문제도 있다. 인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앞서가던 사람이 뒤처질 수 있고 뒤에 가던 사람이 역전할 수도 있다. 젊었을 때 잘나갔다고 평생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전성기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에 빛난다. 그러므로 특정 시점에서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나는 아직 내 인생의 정점은 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산다. 언젠가 더 나은 날이 올 것이란 희망으로 산다. 그런 나를 지금 시점에서 비교하는 게 부질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비교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더 큰 부자보다는 가난하다. 아무리 키 큰 사람도 더 큰 사람보다는 작다. 무엇이 우월하고, 무엇이 열등하단 말인가.

그렇다고 모든 비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비교는 유용하기도 하다. 비교는 스스로를 자극해 분발하게 한다. 초등학교 다닐 적 우리 할아버지의 일상은 아들네와 딸집을 순회하는 일이었다. 이집 저집 돌면서 손주들의 소식을 전했다. ‘고모 아들이 전교 1등을 했다’, ‘작은아버지 딸이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사촌 동생이 나보다 낫다는 말씀에 스트레스와 함께 큰 자극을 받았다. 이런 할아버지의 도발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고, 나의 승부욕을 촉발했다.

비교는 또한 내가 어디쯤 가고 있고,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준다. 비교가 없는 진공상태에서는 내 형편이 어떤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나는 비교에서 영감을 얻는다. 이것과 저것의 공통점과 차이점, 장단점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 모두 비교가 주는 선물이다.

나만의 속도로 가자, 나는 나대로 존귀하다

나는 비교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장점만을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먼저, 내 비교 대상은 남이 아닌 나의 과거다. 책을 출간했을 때 다른 책과 내 책의 판매 실적을 비교하지 않는다. 이전에 내가 냈던 책과 비교한다. 헤밍웨이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동료보다 우월한 것은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고귀함은 이전보다 우월한 데 있다.” 비교 기간을 길게 잡으면 발전이 없을 수 없다. 나는 과거보다 나아진 자신을 칭찬한다. 그리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스스로에 회초리를 든다. 과거와 현재만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비교한다. 과거의 영광에, 현재의 성취에 도취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비교의 비극은 남의 최상과 자신의 최저를 견주는 데 있다. 남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순간과 나의 부끄러운 순간을 비교한다. 내게 없는 것을 남은 다 가진 것 같고, 나만 불행하고 모두가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누구에게나 그늘이 있다. 그늘이어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뿐이다. 나는 퇴고를 거듭한 남의 최종 원고와 나의 초라한 초고를 비교하면서 좌절하지 않는다.

비교의 기준도 내가 정한다. 나는 비교의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주관적 척도를 신뢰하고 존중한다. 나의 비교 척도는 잘함과 못함이 아닌, 좋아함과 싫어함이다. 내가 남보다 못해도 그들보다 좋아하면 된다. 남들보다 책이 덜 팔렸어도, 그런 책보다 내 책이 더 좋으면 만족한다. 비교 기준은 다양하다. 돈, 지위, 외모, 말솜씨, 신체적 건강, 글재주, 음악적 재능, 미술적 감각, 운동신경, 다정함 등 셀 수 없이 많다. 하나의 잣대가 아니라 여러 선택지가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척도로 나를 평가하면 된다.

이 밖에도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많다. 비교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독보적 존재가 되기, 남과 협력해서 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비교를 일삼고 부추기는 사람을 멀리하기,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을 쌓아가기,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만의 분명한 목표의식으로 정진하기.

어차피 인생은 각자도생이다. 내가 남의 삶을 살 수 없고, 남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남을 향한 시선을 내게로 돌리자. 나의 길을 꿋꿋하게 가자.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자. 나는 나대로 존귀하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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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