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근미래 SF영화에서 왜 ‘그분들’이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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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와 분명 변화가 있다. 여전히 그는 카메라 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며 우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봉준호 월드’의 전형을 그리고 있지만, 세상의 앞날을 보는 그의 시각이 조금 관대해졌다고나 할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목: 미키 17(Mickey 17)

제작연도: 2025

제작국: 한국, 미국

상영시간: 137분

장르: SF, 판타지

감독: 봉준호

출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토니 콜렛, 마크 러팔로,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개봉: 2025년 2월 28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시사회가 끝난 후 한 평론가와 영화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론가가 말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촉’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필자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봉준호 감독을 여러 차례 인터뷰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봐서 영화를 찍은 건 2024년 이전이었을 것이고, 시나리오를 최종 탈고한 건 수년 전이었을 것이다.

신통하게도 영화는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모든 국민이 적나라하게 목격했던 대한민국 최상부 권력에서 비밀스레 벌어진 일들을 우화 형식으로 야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미국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권력자, 내놓고 이야기한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연상될 것이다. 영화를 찍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소설을 구해 읽었다. 벌써 1~2년 전이다. 거기엔 마셜의 배우자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왔던 기억은 없는데?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심야 좌담프로그램에 출연한 봉 감독의 말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셜(마크 러팔로 분)의 부인 일파(토니 콜렛 분)는 음식 소스에 광적으로 집착하는데, 원작 소설에는 없는 창작 캐릭터다.

원작 소설 형식에 담은 ‘봉준호 월드’

SF 장르의 형식을 걸쳤지만, 누차 이야기하는 것처럼 봉준호 영화는 특유의 색깔이 있다. 우화와 같은 블랙코미디. 감독 본인은 반기지 않는 별명인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은 웨스 앤더슨 영화처럼 형식미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큰 이야기 뼈대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미키 7>에 비교적 충실하되, 그 내용은 봉준호식 각색으로 채워 넣었다. 예컨대 소설에서 ‘익스펜더블’에 지원한 주인공 미키는 역사학자였다. 영화 속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한때 유행 타던 마카롱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한 실직 청년이다(<기생충>(2019)에서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의 가세가 몰락한 것은 역시 유행처럼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사라진 대만 카스텔라 가게를 했기 때문이었다). 빚쟁이에 시달리던 미키의 해결책은 우주 식민지 개척단에 지원해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당장 떠나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택한 게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과거 잘나가던 1980년대 액션 스타들을 총집합해 놓은 영화 시리즈의 제목이 이 익스펜더블이었다. 익스펜더블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당시 선택한 단어는 ‘총알받이’였던 것이 기억난다)이었다. 익스펜더블은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우주 공간에서 주로 ‘몸빵’을 하는 존재다. 예컨대 그들이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의 대기엔 인체에 치명적인 어떤 바이러스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내려 정착하기 전에 미키만 홀로 내보내 행성 대기 상태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실제 그 임무를 수행한 미키는 죽었고, 백신을 개발해 적용 완료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우주선 밖으로 나가는 건 유예된다. 영화는 탐사 수행을 나간 미키 17, 그러니까 17번째 미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 기지로 돌아와 보니 이미 그가 죽었다고 판단해 프로토콜에 따라 18번째 미키가 만들어지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로 시작한다.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가 담은 주제 의식은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일곱 편에 걸친 그의 작품을 리뷰하면서 필자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어떤 주제 의식이 있다면 ‘진정성에 대한 냉소’와 계급 혹은 사람들 간의 분리와 단절이라고 봤다. 끝은 항상 그런데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에 대한 다짐, 내지는 바람으로 끝나지만 심연에 흐르는 건 그게 과연 이뤄질 수 있겠냐는 회의 같은 것 말이다. 예컨대 영화 <기생충>의 결말에서 기우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짐한다. “계획을 세웠어요.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일. 이사하는 날,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 편지는 지하실에 고립된 아버지에게 부칠 수도 없고, 아버지가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고 감탄했던 기우의 마지막 계획은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영화는 은연중에 암시하며 끝난다. <미키 17>에서 미키는 이 지구로부터 이주민 중에서도 ‘밑바닥 인생’(그람시가 만들어내고 스피박이 널리 퍼뜨리는 개념으로 말하자면 서발턴(subaltern))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봉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분명 변화가 있다. 여전히 그는 카메라 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며 우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봉준호 월드’의 전형을 그리고 있지만, 세상의 앞날을 보는 그의 시각이 조금 관대해졌다고나 할까. 감독과 다시 인터뷰할 기회가 있다면 아카데미상 수상 후 요 몇 년간의 사정을 묻고 싶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교정된 식민주의 대안 판타지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미키 17>은 한국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제작사는 워너브러더스다. 굳이 분류하자면 할리우드가 이제는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에게 투자해 만든 할리우드 영화다. 2019년 <기생충>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봉 감독은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는 지난 20년간 큰 영향을 가졌음에도 왜 단 한 작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했냐”는 질문을 받고 “오스카는 로컬이잖냐”, 그러니까 지역문화제라고 쿨하게 답을 했다. 이 답은 꽤 큰 반향을 끌어냈다. 필자는 <기생충>이 202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 상을 휩쓸게 된 데는 봉 감독이 미국 주류사회에 일깨워준 그 무엇도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아카데미 작품상 중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된 작품이 작품상을 받은 것은 2020년까지 92년의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사실 <미키 17>의 서브플롯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교정된’ 서구 정체성의 과거와 대안적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지구이주민들이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엔 선 거주자들이 있었다. 마셜은 그들에게 멋대로 ‘크리퍼’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폭살 계획을 세운다. 서구 정체성의 과거라는 것은 콜럼버스 이래로 원주민을 말살·학살한 식민개척사가 감춰진 진실이기 때문이다. 지구이주민의 가장 밑바닥의 하찮은 ‘서발턴’인 미키 17이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법을 처음 알아내고, 결국 그들과 공생하는 삶이 독재자의 폭주를 이긴다는 것은 대안 판타지다. 이 점에서 <미키 17>의 세계관은 하인 라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 시리즈(사진)와 대척점에 서 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여기에 대해서도 꼼꼼히 다뤄보고 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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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