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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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편집장

이주영 편집장

또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배우 김새론씨가 악플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언론계 종사자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같은 여성으로서 참담한 마음이 듭니다.

고인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 상태에서 운전을 한 건 두말할 여지 없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음주운전 사고 피해로 한 가정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비극이 끊이지 않습니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좀더 신중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에 대한 법적·도의적 대가를 치르고 활동을 중단하며 자숙하는데도 이어진 비난과 공격의 수위는 가혹했습니다. 온라인에선 인신공격성 악플이 이어졌고, 언론 역시 악의적인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보도하며 폭력이나 다름없는 행위에 동참했습니다. 정론지를 지향하는 자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반성합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이 지금도 검색하면 나옵니다.

우리는 연예인에게 왜 이리 가혹할까요. 특히 여성 연예인에게는 마치 짓밟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는 듯한 의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리일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일부 극소수의 댓글러가 문제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이 같은 비극이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 특히 청소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은 공인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연예인이 무슨 공인이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특정인에 대한 인격 살인은 공인이건 사인이건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이뤄지는 낙인찍기, 욕설과 원색적인 언어를 동원한 조롱과 혐오는 강력히 처벌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권에선 ‘구하라법’, ‘설리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안을 쏟아냈지만 모두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돼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수십 년간 반복되는 이러한 비극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됩니다. 사상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 이후 우리 사회가 그동안 합의하고 지켜온 질서와 원칙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초법적·비이성적 언행이 마치 별일 아닌 양 치부하는 행태가 반복되면서 혐오와 증오의 언어는 그 영역을 급속도로 넓혀가고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을 계기로 나 자신이 표적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해도 되는 것과 절대로 해선 안 될 것에 대한 엄격한 구분과 재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느낍니다.

이번 주 주간경향은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 반 동안 여성정책이 어떻게 후퇴했는지를 짚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하려던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가 법무부·여당의 반대로 철회된 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여가부 직원들에 대한 감찰조사를 벌인 사실을 최초 보도합니다. 돌봄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법한 청년 활동가들이 공공돌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온라인 게임까지 만든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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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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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