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1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서울대공동행동 등 진보단체(위)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서울대인 등 보수단체(아래)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반대 집회를 각각 진행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 2월 15일, 서울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찬반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대학가는 시위와 집회에 익숙한 곳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79년 2학기에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시위가 있었다. 집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러나 이번 서울대 집회는 내게 매우 생경하게 다가왔다. 탄핵 반대 집회라니? 그것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옹호하는 집회라니?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을 서울대 재학생이라고 밝힌 참가자가 있었다니? 그리고 찬반 실랑이 속에서 박종철 열사 사진이 훼손됐다니? 생경함을 넘어 섬뜩함이 머리를 때렸다.
아크로폴리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되뇌는 단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서울대는 정말 ‘민족의 영재들’ 길러낸 걸까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김태훈은 내 동기다. 나는 1981년 5월 27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태훈이를 잘 알지 못했다(경제학과 동기는 100명이 넘는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태훈이는 우리 78학번들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뜻을 잊어서도 안 되는 소중한 상징이 됐다. 그 상징의 무심한 구현이 바로 서울대 중앙도서관 옆의 아크로폴리스다. “전두환 물러가라”며 온몸으로 군부 독재에 항거한 현실에서의 표상이 아크로폴리스다.
‘그 사건’ 이후 우리 동기 중 많은 이들이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을 느끼며 살아왔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빛이 바래고 무뎌지기는 했지만, 그 죄책감은 일종의 사명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고, 모두가 조금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 후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때 대학생이던 필자는 이제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꼰대 중의 상꼰대가 됐다. 그리고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 세대는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와 교육도.
그럼 지금 한국사회는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그때보다 인간이 더 존중받고 모두가 조금 더 잘살게 됐을까?
최근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도 탄탄해졌고, 산술평균으로 측정한 1인당 국민소득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K문화로 대변될 만큼 문화적으로도 다른 나라와 어깨를 겨루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이후 ‘이런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부쩍 들고 있다. 권력자는 언제든 군대를 동원할 수 있고, 상당한 정도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빈곤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K문화의 이면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비뚤어진 사람 등급 나누기와 사회적 조리돌림이 자라고 있다. 무엇보다 일신의 평안함을 위해 자유와 정의를 쉽사리 저버릴 수 있다는 발상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파시즘은 이런 독버섯을 먹고 자란다는데.
이런 의심이 이번 정부 들어 급속히 확산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번 정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서울대 정부’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초로 서울대의 정규 교육을 받고 집권한 대통령이다(김영삼 대통령도 서울대를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다는 사람들도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최상목 부총리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서울대 출신이다. 그런 정부에서 불법적인 비상계엄이 터졌다. 서울대는 정말 ‘민족의 영재들’을 길러낸 것일까?
물론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들지 않듯이, 한두 명 졸업생의 일탈을 그들이 다녔던 대학 교육 전체의 실패로 몰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이 전체적으로 무엇인가 삐딱선을 탔다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점수를 기초로 한 사람 등급 나누기’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면 의대를 못 간 이과생은 ‘2등 학생’이며, 모든 문과생은 그냥 ‘수포자’일 뿐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은 더 훌륭한 사람이고, 따라서 남보다 더 우월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응당 받아야 할 우월한 대접을 못 받을 때는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니까. 그리고 여학생이 성적이 더 좋은 것은 군대에 안 가기 때문이거나, 선생님에게 예쁨을 받아서일 것인데, 이런 것들은 모두 부당하다. 그러니까 여자는 걸림돌이고 페미니즘은 나쁜 것이다.
어쩌면 대다수 학생의 생각은 건전하고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생은 극소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제는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인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들 말이다. 나는 주위에서 위와 같은 생각을 말하는 학부모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한다. 의대를 지원하지 못한 학생의 부모는 그저 죄인이고, 아들 가진 부모는 은연중에 여성에 대한 불편함을 언급하기 일쑤다.
성과 지상주의에 취해 통합 좀먹는 것 간과
많은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는 윤 대통령 탄핵 사건 심리를 보면 신뢰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희소한 자원인지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신뢰의 실종은 어쩌면 표피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더 깊은 곳에는 관용(톨레랑스)의 실종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도무지 다른 의견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의 의견은 내 의견과 다르고 나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팩트에 반하는 거짓말이 아닌 한) 그것도 하나의 존중받을 수 있는 의견이라고 본다. 이런 관용이 있어야 그 사회는 지켜야 할 공동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다.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 박종철은 1987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참한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은커녕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의 죽음과 그 뒤를 이은 많은 사람의 희생에 힘입어 그 야만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우리 세대는 한편으로 그런 희생에 일조하기도 했으나 그런 희생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사회발전도 누렸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눈앞의 달콤한 사회발전의 사탕 맛에 취해 우리 후속 세대를 제대로 키워내는 데는 소홀히 했다. 성과 지상주의에 취해 그것이 사회적 통합과 관용을 좀먹고 있다는 점은 간과했다. 탄핵 찬반의 난투극 속에서 찢어진 박종철의 사진은 공동체의 붕괴를 보여주는 아픈 상징이다. 우리 세대는 정녕 실패한 것일까?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