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개발 반대에 규제 완화로 답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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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기자

이효상 기자

“내 말에 틀린 부분 있으면 말해봐요.”

쪽방 밀집 지역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A씨는 확신에 차 말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모두 옳아서가 아니라 기본 전제부터 동의할 수 없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동네를 토지·건물주들의 뜻대로 민간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2021년 쪽방 주민들에게 공공 임대아파트를 공급하는 공공개발 계획을 발표하고도,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 지난 4년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토지·건물주들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 이 일대는 1978년부터 개발이 추진됐다. 그럼에도 번번이 개발이 무산된 것은 선뜻 나서는 업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산 인근으로 고도제한이 있어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없었고, 암반 지대로 공사비 부담도 컸다. 더구나 이 지역은 1960년대부터 도시빈민들이 모여 형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쪽방 밀집 지역이다. 이들에 대한 이주 대책 없이는 개발 과정이 순조로울 수 없었다. 맥락없이 정부가 공공개발을 들고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민간개발이 어려워 공공개발이 추진됐다고 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이제 와 다시 민간개발을 추진하면 없던 사업성이 생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민간개발을 주장하는 토지·건물주들은 공공개발에 반대하면서도 이 계획에 준하는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동자동 같은 서울시의 2종 일반 주거지역은 개발 시 200% 이하의 용적률이 적용된다. 동자동 공공개발 사업의 경우 정부는 최대 700%의 용적률을 적용할 계획이었는데, 토지·건물주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는 민간개발 사업에도 공공개발과 같은 수준의 용적률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이들의 욕망에 길을 열어줬다는 점이다. 지난 2월 7일 시행된 도심복합개발 지원법은 민간 사업자가 도심 노후 지역을 개발할 경우 최대 700%까지 용적률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자신들이 뱉은 공공개발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토지·건물주들의 ‘앓던 이’까지 빼줬다. 정부는 어디까지 뒷걸음질을 칠 것인가. ‘더 이상 쪽방 같은 주거 형태는 존재해선 안 된다’는 공공개발 계획 발표 당시의 의지를 지금이라도 다잡아야 한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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