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딥시크 쇼크 대응과 AI 발전 전략’ 긴급 간담회 / 연합뉴스
세계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수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과학자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건 과학자 주변의 일이게 마련이다. 미국 과학자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닥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신음모론자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부 장관에 지명했고, 그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음모론을 언급했다.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 의생명과학을 지탱했던 미국립보건원 NIH의 미래가 위태롭다. 트럼프 정부는 며칠 전, NIH가 연구비와 함께 대학에 지급하던 간접비를 대폭 삭감한다고 밝혔다. 미국 과학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평가도 많다. 간접비 삭감으로 미국 과학계의 역량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하버드대학 등이 지나치게 높은 간접비를 챙겨왔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보스턴 코리아 프로젝트 또한 간접비 문제로 미국 기관들과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던 터라 이 상황이 어떻게 한국 과학계에 영향을 미칠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일본·한국·대만·중국, 그들의 과학
미국이 세계 과학의 리더가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미국 과학자들은 박사학위를 위해 유럽 각지로 유학을 떠나는 일이 흔했다. 미국이 과학계에서 독보적이라고 부를 만한 분야는 초파리 유전학 정도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미국은 독일이 패망하던 시기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수백 명의,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독일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에 의해 맨해튼 프로젝트가 완성됐고,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됐다는 건 이제 <오펜하이머> 등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현재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 과학의 시작은 독일 과학의 철저한 수입이었던 셈이다. 미국은 꽤 비싼 돈을 관세로 지불하고 과학기술에 국운을 걸었고, 그 성공으로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최강국으로 건재하게 된 셈이다.
미국의 발전을 지켜본 국가들은 이 전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과 비슷한 시기에 수많은 과학 분야의 유학생을 파견했고, 이들의 귀국과 더불어 과학을 발전시켰다. 제국주의 국가의 꿈을 꾸던 일본은 전방위적으로 과학기술을 지원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노벨상은 바로 이 시기의 유산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 모델을 차용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자를 일종의 자원으로 가정하고, 이들을 과학기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국가가 관리한 것이다.
이런 제도하에서 수많은 유학생이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갔고, 한국과 대만의 과학기술은 바로 이들 일본과 미국 유학파에 의해 주도됐다. 두 국가 모두 독재와 민주화를 경험하며 때로는 비슷하게 때로는 다르게 발전해왔지만,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대만은 결국 TSMC라는 기업으로, 한국은 삼성이라는 기업으로 축약된 결과가 나타났다. 두 기업의 운명이 지난 반세기 두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을 가늠하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이다.
최근 중국의 무명기업이 내놓은 인공지능 딥시크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중국이 국가가 주도하는 과학기술정책에 뛰어든 건 일본, 한국, 대만에 비하면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과학의 축은 항상 움직인다
얼마 전 US News가 발표한 세계 공대 랭킹을 중국 대학이 장악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넘어, 2024년 네이처 인덱스에선 과학 분야 세계 최상위 대학교 10위 중에 8개 대학이 중국 대학임이 알려져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리스트에도 들어 있는 저장대 출신의 량원펑이 주도한 AI계의 테무, 딥시크는 이 모든 뉴스가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중국이 과학기술주도 경쟁에 뛰어든 건 일본, 한국, 대만보다 훨씬 늦은 1980년대였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만, 중국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유학생을 전 세계로 보냈고, 그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개의치 않았다. 중국의 경제가 궤도에 오르자 천인계획과 만인계획 등의 인재 유치 작전으로 수많은 최고급 중국인 과학기술자가 대거 입국했고, 이들에 의해 중국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량원펑을 비롯한 딥시크의 모든 엔지니어는 국내파라고 한다. 즉 중국은 일본이 100년에 걸쳐 이룬 과학기술인력의 국산화를, 겨우 40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루어낸 셈이다.
과학의 축은 계속 움직여왔다. 17세기 근대과학 혁명 이후 영국이 19세기까지 과학을 주도했지만, 프랑스와 독일이 차례로 과학을 발전시키며 19세기 중반이 되면 독일이 과학기술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 독일의 과학성과를 그대로 가져간 것이 미국이었고, 미국은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간 세계의 과학을 이끌어왔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대학, 연구비, 연구소 등의 제도가 미국에서 만들어져 세계로 퍼져나간 것들이다.
영국이 근대과학의 문을 열었고, 독일이 과학기술에 날개를 달았다면 미국은 표준화된 실용주의 과학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그리고 이제 누가 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학의 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옮겨가려 하는 것이다.
고급 과학을 원한다면 관세를 올려야 한다. 중국 과학계의 특징을 꼽으라면 강한 국가주도주의, 엄청난 물량 공세,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존중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한때 과학을 주도하던 영국,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사회에서도 이런 제도와 문화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중국은 과학의 축이 되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벤치마킹해야 하는지 꿰뚫어 본 것이다. 그 결과가 엄청난 인재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주고 데려온 천인계획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과학의 선도국이 되기 위해 이미 엄청난 관세를 지불했고, 또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독일의 과학 연구기관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NIH 예산 삭감으로 미국을 떠나려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려 한다는 뉴스가 떴다. 며칠 전 세미나 후 식사 시간에 중국 정부와 각 연구소 수장들이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미국 내 중국 과학자들의 유치에 나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래를 예측할 순 없지만, 만약 이런 사태가 지속된다면 정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페이퍼클립 작전이 다시 펼쳐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독일과 중국은 관세를 지급하고서라도 고급 인재를 모셔올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우리는 과학자들이 한국을 떠날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김우재 낯선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