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금이 만든 캘리포니아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에는 골드러시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에는 골드러시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포티나이너스(49ers).’ 전설적인 쿼터백 조 몬태나가 활약하던 인기 있는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팀의 이름이다. 샌프란시스코와 포티나이너스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포티나이너스는 미국 역사에서 독특한 의미가 있다. 이는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부로 몰려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금을 찾는 포티나이너스야말로 미국 서부 개척의 핵심동력이었다.

보스턴 등 동부에서 시작된 백인들의 아메리카대륙 정착은 유럽으로부터 인구 유입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서부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까지는 ‘대평원’이라고 불리는 로키산맥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서부 개척을 본격화한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종교 탄압에 따른 모르몬교도들의 대이동이다. 미주리와 일리노이에 주로 자리 잡고 있던 모르몬교는 일부다처제 등과 관련, 1844년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타살당하자 일부가 대대적으로 서부로 이동했다. 이들은 로키산맥을 넘어 솔트레이크시티 등 유타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유타지역은 아직 서부 끝과 태평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두 번째는 백인이나 백인혼혈의 경우 4년간 일하면 땅의 소유를 인정한다는 오리건 지역의 토지 기증법이다. 이 법이 알려지자 땅을 갖지 못한 백인들이 땅을 찾아 서부로 이주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것으로 금이다.

인구 세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이다!” 1848년 초 제임스 마셜은 새크라멘토 근처의 콜로마 근처 강에서 금을 발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 북쪽의 오리건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금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이들은 쉽게 떼돈을 벌었다. 이 소식이 동부, 나아가 세계로 알려지자 미국 동부뿐 아니라 유럽, 라틴아메리카, 멀리 중국에서까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골드러시’였다. 특히 1849년 포티나이너스가 몰려들며 금 생산이 최고조에 달했다. 1849년 초를 기준으로 캘리포니아 인구는 10만명 정도로 알려졌는데, 1849~1855년 이의 세 배에 달하는 30만명이 몰려들었다.

골드러시 전에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300여명의 작은 항구에 불과했다. 1850년 인구 2만5000명의 큰 항구로 발전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배들이 샌프란시스코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샌프란시스코를 만든 것은, 아니 캘리포니아를 만든 것은 골드러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사 앞 공원에 포티나이너들이 삽을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지역처럼 캘리포니아도 원래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거주지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타바버라 방향으로 두 시간 달려가면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는 추마시 동굴이 나타난다. 1000년 전에 원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미 대륙에 도착(발견이 아니다)했지만,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서부에는 1542년에나 유럽 배가 도착했다. 이후 스페인은 물품교환소와 성당 등을 지었지만 지리적 조건 때문에 스페인 등 유럽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속하게 됐다.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포티나이너스에게 학살당한 가족에 대한 인디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손호철 제공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포티나이너스에게 학살당한 가족에 대한 인디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손호철 제공

포티나이너스는 두 가지 경로로 캘리포니아로 올 수 있었다. 우선 바다다. 당시는 파나마운하가 없었던 만큼 동부나 유럽에서 캘리포니아로 오기 위해서는 남아메리카 끝을 지나 3만3000㎞를 항해해 반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여행이 너무 힘들어지자, 일부 해운회사들이 동부에서 고객들을 모집해 니카라과, 파나마 대서양 쪽에 내리게 한 뒤 카누와 당나귀를 타고 정글을 통과해 태평양 쪽에 도착해 거기서 다시 증기선으로 캘리포니아로 승객들을 운반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바다 항로를 택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육로를 택했다. 캘리포니아 트레일이 그것이다. 캘리포니아 트레일은 미주리강에서 캘리포니아 서부지역까지 2600㎞에 달하는 험난한 길로 대강 6개월이 걸렸다.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4명 정도가 타고 이동했다. 마차 준비와 식량 등으로 캘리포니아 행에는 1인당 100달러 정도 들었다. 이는 일반인들이 넉 달은 벌어야 하는 돈으로 몹시 가난한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행에 동참하지도 못했다.

황금에 눈멀어 원주민 제노사이드

일확천금을 향한 캘리포니아 트레일의 마지막 난관은 캘리포니아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맨재너 수용소에서 북으로 달려 매머드 호수를 지나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공원 요세미티로 향했다. 지그재그로 아찔한 요세미티공원의 산길을 달리자 마차를 타고 이곳을 넘어가던 포티나이너스들이 가파른 길에 힘들어하는 말을 다그치는 채찍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리포사. 요세미티에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서면 나타나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는 캘리포니아주가 옛 금광을 박물관으로 만든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개장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골드러시에 대한 많은 자료와 광물이 진열돼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금한다고 한다. 미술관의 세계적인 명작들도 사진을 찍게 하는 시대에 웃기는 관료주의다.

주목할 것은 골드러시가 동양인들의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출발점이 됐다는 사실이다. 골드러시 직전인 1848년 미국에 800명에 불과했던 중국인은 1860년 2만5000명으로 늘어났고, 한때 금광 노동자들의 25%를 차지했다. 중국인은 용모나 복장에서 눈에 띄었고, 반중국 분위기가 생겨났다. 1877년에는 월로우카운티에서 중국계 금광 노동자 34명이 집단학살 당했고, 차이나타운을 불 지르고 공격한 샌프란시스코 폭동이 일어났다.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백인들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요세미티공원 역사관에는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백인들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손호철 제공

골드러시의 최대피해자는 원주민들이었다. 유럽인 등 외부인들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면역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각종 유라시아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티나이너스들은 금을 캐기 위해 이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학살했다. “인디언이 박멸될 때까지 두 종족 간의 박멸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초대 캘리포니아주지사인 피터 버넷은 공공연히 원주민 박멸을 주장했다. 골드러시 전 15만명에 달했던 캘리포니아의 원주민은 1860년에는 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황금이 백인들의 원주민 제노사이드를 가져왔으니, ‘황금에 눈이 먼다’는 말 그대로다.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에 전시 중인 광물들 / 손호철 제공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에 전시 중인 광물들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광장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있게 한 금광 개척자들 포티나이너스의 동상이 서 있다. / 손호철 제공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광장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있게 한 금광 개척자들 포티나이너스의 동상이 서 있다. / 손호철 제공

마리포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 / 손호철 제공

마리포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 금·광물박물관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바로가기

이미지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