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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기자

김찬호 기자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무슨 달그림자 같은 거를 쫓아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출석해 ‘비상계엄’은 선포했지만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시적 감수성과 별개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아니면, 말고’식 태도에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 출범 후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아직도 본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현행 한국 정치구조에서 대통령은 최고의사결정권자입니다. 윤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 명패에 써두었다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문구는 단순한 명언이 아닌 그가 느꼈어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상징합니다. 재판에서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식의 태도가 유리할지 모르나 정치 지도자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의 주장처럼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요.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은 미국의 정권 교체를 한 달여 앞두고 시행됐습니다. 모든 나라가 변화된 국제질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사실상 멈췄습니다. 1450원대까지 치솟은 환율은 소비자물가상승률도 2%대로 끌어올렸습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안보질서의 변화 움직임도 보입니다. AI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각국이 사활을 걸고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적 난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지시를 했네, 안 했네’, ‘그런 단어를 쓰네, 안 쓰네’로 다투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야당에 경고 한 번 하겠다고 ‘비상계엄’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국회가 막아서 빠르게 철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통령직에 복귀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처럼 중대한 변곡점에 차라리 다행 아니냐”라는 취재원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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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