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가이처럼 침착하고 의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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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주간경향 독자님들은 ‘칠 가이(Chill Guy)’를 아시나요. 얼마 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인터넷 밈(meme)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SNS를 자주 이용하시는 독자님이라면 이름은 몰라도, 본 적은 있을 겁니다. 청바지 차림에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갈색 강아지입니다(캥거루나 카피바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냉소인지 썩소인지, 미소인지 모를 묘한 표정이 특징입니다.

칠 가이는 필립 뱅크스라는 디지털 아티스트가 만들어 2023년 10월 엑스(옛 트위터)에 올리면서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짧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 인터넷 밈으로 가공돼 인기를 끌었고, ‘칠가이코인’까지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2024년 연말부터 SNS를 중심으로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인 칠(chill)은 형용사로 ‘차갑다’는 의미입니다. 명사로는 ‘냉기’, 동사로는 ‘차게 만들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바탕으로 요즘은 ‘느긋하다’, ‘침착하다’란 표현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칠 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실제로 칠 가이의 표정과 자세를 보면 묘한 여유가 느껴집니다.

한국에서는 칠 가이가 ‘지난해 연말’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독자님들도 잘 알다시피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전혀 침착할 수도, 느긋할 수도 없었습니다. 계엄에 따른 대통령 탄핵소추가 곧바로 이어졌고, 지난해 12월 29일에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있었습니다. 그 여파는 해를 넘긴 올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과 내란혐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들은 가족들의 장례를 치렀을 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경제 상황은 얼마나 나빠질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러니 한국의 젊은이들이 칠 가이의 느긋하고 침착한 표정을 보며 위안을 받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는 표지 이야기로 ‘표류하는 쪽방촌 공공주택사업’을 준비했습니다. 대통령 탄핵 심판과 가시화되는 조기 대선으로 대중의 이목이 쏠려 있지만, 한국사회에는 그 외에도 관심을 둬야 할 일이 많습니다. 마침 지난 2월 5일은 국토교통부, 서울시, 용산구가 ‘동자동 공공주택사업’을 발표한 지 꼭 4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부채질하는 정치 양극화 현상, 사그라지지 않는 가짜뉴스 생태계도 살펴봤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중국의 인공지능(AI) 딥시크가 한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분석했습니다. 주간경향은 칠 가이처럼 느긋하고 여유롭지는 않아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계속 세상을 돌아보겠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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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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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