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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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가자지구 남부 최대 도시 칸유니스에서 한 팔레스타인 아이가 물통이 든 수레를 끌고 폐허가 된 거리를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7월 가자지구 남부 최대 도시 칸유니스에서 한 팔레스타인 아이가 물통이 든 수레를 끌고 폐허가 된 거리를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

대학 시절 수강한 국제정치사 수업의 한 대목이 지금도 기억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난제로 유명했던 선생의 강의는 간혹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무리됐다. 공자님 말씀이 아니라 어떤 존재·사건에 올바른 명칭을 붙이려 애써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날 수업은 한국전쟁이 왜 틀린 용어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한반도전쟁’이라면 모를까, 한국만 붙여서는 침략국 북한의 존재를 지우게 된다고 선생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외국 학자의 ‘The Korean War’ 개념을 게을리 번역한 결과물이었다.

국제부에서 일하는 동안 유독 그때 수업을 여러 번 떠올렸다. 내 담당 지역은 일본이지만 가끔 중동 지역 기사도 쓰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대개 ‘가자전쟁’ 관련이다. 전황부터 휴전 협상 진전까지 시점과 관점에 따라 내용은 다양하지만, 상당수 기사가 이런 배경 설명을 포함하곤 했다. “‘가자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남의 기사를 읽으며 고개 갸웃하고는 나 역시 비슷한 문장을 적는 게 영 면구스러웠다.

좁은 식견으로도 둘 사이 갈등 연원이 깊고 오랜 것임은 알았기 때문이다. <가자란 무엇인가>의 저자 오카 마리는 가자지구 주민들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인종 청소로 인해 폭력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최소한 1967년 서안지구·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과 의약품 등 물자 보급 중단을 포함한 봉쇄 행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전쟁’이라고 뭉뚱그려선 곤란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명시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처럼 대등한 두 주체의 충돌 비슷하게 기술하는 것도 그는 반기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해 12월 29일 무안공항에서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를 두고도 명칭 논란이 있었다. 항공기 사고는 항공사 이름과 편명을 쓰는 게 국제표준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무안공항 참사’라는 명명을 주장했다. 대형 참사엔 종종 사고지역명을 쓰며, 공항 내 둔덕·철새 등 장소 연관성도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설득력이 크지 않았고, 괜히 지역혐오만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정부와 유족이 협의한 명칭은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였다.

어떻게 부르는 것이 맞을까. 나는 각각 6·25전쟁, 가자전쟁, 제주항공 참사란 이름을 쓴다. 하마스의 공격이 ‘저항권’ 행사라는 말에는 고개 끄덕이지만, 매번 긴 역사를 함께 적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봤다. 여객기 참사 명칭은 ‘제주항공 2216편 사고’가 원칙이겠지만 축약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다만 사명에 쓰인 ‘제주’ 글자도 빼야 하지 않느냔 지적엔 잠시 움찔하게 된다. 꼭 타당해서가 아니라 참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돌아보면 코로나19는 한때 ‘우한 폐렴’, ‘대구 코로나’로 불렸다. 반대로 선입견을 경계해 만든 ‘10·29 참사’보다는 ‘이태원 참사’가 더 많이 쓰인다. 명칭은 자주 잠정적이다. 무언가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따금 내 논리를 점검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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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