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라노>·<베르테르>·<웃는 남자> 등

뮤지컬 <시라노> 공연 장면 / RG컴퍼니·CJ ENM
불신과 분노, 분열이 이 시대의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범람하는 가짜뉴스와 혐오 발언들은 더 큰 폭풍을 예고하는 전조 같다. 진실과 정의는 이제 도서관 책 속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불안이 높아지던 차에 뮤지컬 <시라노>, <베르테르>, <웃는 남자>를 만났다. 사랑의 숭고함에 대해 돌아보고 평정심을 되찾게 만드는 이 작품들이 연일 객석을 가득 메우며 몇 달간 상연 중인 것은 시국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뮤지컬 <시라노>(레슬리 브리커스 대본, 김수빈 각색·한국어 가사, 김동연 연출·각색,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 제이슨 하울랜드 편곡)는 호방하고 기개 넘치는 시라노(조형균·최재림·고은성 분)의 삶을 유쾌하고 뭉클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검객이자 문필가이며 구휼에도 앞장서는 시라노는 모든 것을 갖췄으나 외모가 좀 아쉽다. 코가 너무 커서 놀림당할 때도 많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록산(나하나·김수연·이지수 분)은 그의 외모보다 정의로움과 문학적 소양에 더 관심이 많다. 물론 록산의 첫사랑이 잘생긴 크리스티앙(임준혁·차윤해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슴 한쪽이 아리지만, 록산이 행복하면 시라노도 행복하다.
재치·품위·정의 갖춘 짝사랑남
17세기 프랑스의 검객이자 문인이었던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삶을 모티브로 에드몽 로스탕이 19세기 말에 발표한 희곡이 원작이다. 말주변도 문해력도 떨어지는 크리스티앙을 위해 자신의 진심을 담아 연애편지를 쓰고 대신 고백도 해준 시라노 덕분에 록산과 크리스티앙은 결혼에 이른다. 사리사욕에 굴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시라노는 비현실적이어서 선인(仙人) 같기도 하다. 전쟁에서 남편 크리스티앙을 잃은 록산이 상처받지 않도록 평생 친구로서 보살피는 낭만적인 인물이다.
뮤지컬 <베르테르>(고선웅 극작, 조광화 연출, 정민선 작곡, 구소영 음악·협력 연출, 고(故) 심상태 예술감독, 노지현 안무, 정승호 무대)에도 첫사랑이 끝사랑인 로맨티시스트가 등장한다. 첫눈에 반한 여성에게 모든 것을 바친 베르테르(엄기준·양요섭·김민석 분)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발표한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비롯됐다. 롯데(전미도·이지혜·류인아 분)가 결국 알베르트(박재윤·임정모 분)와 결혼하자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자살을 선택한 베르테르는 영원불멸한 짝사랑을 상징한다.
창작진들은 첫사랑의 열망에 대한 소중함과 숭고함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열두 번의 시즌을 거치며 시대 흐름에 맞게 작품을 보완했다. 관객 몰입은 극 도입부 베르테르와 롯데가 함께 낭독한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클롭슈톡의 시구에서 촉발된다. “오 황홀경이여/ 가령 내가 죽을지라도/ 죽어 사라질지라도/ 오로지 그대와 단둘이 함께 전율하리다”는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이 정서적이고 문학적인 명분을 획득했으니 불륜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선언으로 읽힌다.
중소극장에서 시작된 <베르테르>는 시즌을 거듭하며 수채화 같은 회화적 이미지로 치환됐다. 아이보리 톤의 의상과 맑고 섬세한 안무, 영원한 기다림을 상징하는 해바라기 꽃밭 등은 화사하고 애달픈 첫사랑의 다양성이다. 출연진들의 커튼콜 이후 베르테르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앙상한 나무에 싹이 튼 배경을 중심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마무리는 그가 내세에서도 롯데를 기다리겠다는 메시지 같다. 롯데의 현생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더할 나위 없는 마침표다.

뮤지컬 <웃는 남자> 공연 장면 / EMK뮤지컬컴퍼니
빅토르 위고가 1869년 발표한 동명 소설 원작 한국 창작 뮤지컬 <웃는 남자>(로버트 요한슨 대본·연출, 기진주 협력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 권은아 한국어 가사, 제이슨 하울랜드 편곡, 오필영 무대) 또한 약자를 대변하는 순수한 사랑과 정의감을 돌아보게 한다.
종교전쟁과 귀족들의 부패로 혼돈인 17세기 영국. 입이 찢어져 언뜻 보면 영원히 웃는 것처럼 보이는 기괴한 그윈플렌(박은태·이석훈·규현·도영 분)은 시각 장애가 있는 갓난아기 데아(이수빈·장혜린 분)와 떠돌다가 우르수스(서범석·민영기 분)에게 구조된다. 십수 년 후 의남매로 연을 맺고 자신의 사연을 연극으로 공연하며 살아가던 그윈플렌은 정체 모를 이들에게 잡혀간다. 콤프라치코스(Comprachicos·아이들을 장애아로 만들어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삼는 소설 속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됐던 과거가 밝혀지고, 영국 최고 귀족의 적자임이 확인되면서 그는 영국 의회 의결권을 갖는다. 인생 역전의 기쁨도 잠시, 다시 무미건조해진 그는 데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를 키워준 유랑극단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깨닫고 약자들을 돕는 법안을 발의한다.
동시대 관통하는 인내의 미학
영원불멸의 사랑과 정의로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여러 색채로 담아낸 이 작품들은 캐릭터와 혼연일체된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관현악 연주를 위한 편곡, 혹은 악기 편성)으로 더 유명하다. <베르테르>는 드라마틱하게 서사와 연동된 다양한 현악기의 독주와 합주, 그 안을 가로지르는 피아노 연주로 캐릭터와 관객의 감성을 일체화한다. 구소영 음악감독은 마지막 장면의 오케스트라 연주와 장면의 상호작용성에 관한 질문에 “연주 전 무대를 보고 저 장면을 음악에 담아야 한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과 은은한 달빛과 서늘한 바람이 음악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며 첫 음을 친다. 그래야 베르테르가 더 슬프고 아프게 떠날 것 같아서이다”라고 말했다.
<시라노>는 대표적인 넘버 ‘거인을 데려와’에서 웅장한 관악기 합주를 통해 “빛나는 용기를 품고 혼자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만 해 세상 모든 거인과 맞서리라”라며 위풍당당한 기개를 강조한다. <웃는 남자>는 그윈플렌의 대표 넘버 ‘그 눈을 떠’를 통해 웅장한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저 벽을 무너뜨려 참된 자유만 오직 정의만 살아 숨 쉬게 거짓을 꿰뚫어 봐. 이제는 그 눈을 떠봐”라며 동시대의 불안과 불신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직시하고 꿰뚫어 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세 작품은 모두 각자 마음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기다림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꿈꾸는 세상이,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이 이뤄질 것이라는 염원으로 마무리된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인내와 기다림의 미학이다. 이 넘버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라노>는 2월 23일, <웃는 남자>는 3월 9일, <베르테르>는 3월 16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