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시크, ‘일반기억’의 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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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시크 로고 / 로이터연합뉴스

딥시크 로고 / 로이터연합뉴스

인공지능(AI)에는 의식이 없다. 결국 입력을 넣으면 출력하는 전산 설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모든 기억으로 학습된 다소 진보된 외장 기억장치라 할 수 있으니 루소의 일반의지는 되지 못해도 ‘일반기억’이라고는 충분히 불릴 만하다. 인간의 진짜 기억처럼 오염도, 환각도 벌어진다.

기억은 입력된 정보의 양과 질에 좌우된다. 출력 정보를 통제하려면 입력을 관리하면 된다. 그렇기에 각국은 제각각의 모델을 지녀야 한다는 ‘소버린 AI’(주권 AI) 국산품 생산 장려 운동에 매료된다. 유럽도 한국도 국가별 AI 순위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온 세상이 딥시크로 시끄러워졌다.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수출을 막았으니 못 만들 줄 알았던 물건을 보란 듯이 만들어내고, 그 사본 또한 누구나 받아 내릴 수 있도록 공개해버렸다. 무역전쟁 중인 미국 정부, AI 챗봇의 대명사 오픈AI와 구글 그리고 오픈소스 AI 모델로 판을 새로 짜보려던 메타까지 갑자기 머쓱해져 버렸다. 주식시장도 요동쳤다.

딥시크가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알려진 지는 꽤 됐다. 품질은 챗GPT를 무색게 하는데, 무료라는 소문에 알음알음 쓰고 있었던 상태. 중국제인지도 몰랐고, 별 관심도 없었다. 뉴스를 먼저 보지 않았다면 일상 사용자들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을 터다. 중요한 건 효용이었다. 한국어도 국산품 못지않게 잘한다.

갑자기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부른다. 비판과 검증이 쇄도했다. 챗GPT 같은 기성품을 ‘증류’라는 방식으로 불법 사용해 만들었을지도, 개인정보가 다 수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중국은 정보의 무상 활용을 당연시하는 역사와 문화 안에 산다. AI 학습 자료를 모으는 데도 저작권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 세계 어떤 모델보다 크고 광활한 데이터를 소화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미제 모델로 몰래 단련했다면 관점의 다양성도 확보됐을 수 있다.

딥시크는 메타의 라마(Llama)처럼 모델이 오픈소스로 공개돼 있기에 누구나 가져다가 만져볼 수 있다. 온라인판 딥시크와 달리 오픈소스로 공개된 딥시크 모델을 자가 설정해서 쓰면 톈안먼(天安門) 사태 등 공산당에 민감한 정보도 태연히 알려준다. 딥시크는 전 세계의 일반기억이 될 소양을 실은 갖추고 있었다.

생성형 AI는 그 덩어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조율(파인튜닝)’하거나, RAG(검색증강생성)라 불리는 외부 정보를 외장하드 붙이듯 더해 나만의 AI를 만들 수 있다. 동일한 일반기억을 공산당식 소버린 AI 풍으로 검열 후 운영할 수도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일반기억이 양산돼 흩어질수록 인터넷의 소중함은 옅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포켓 사전을 들고 다녔던 것처럼 우리는 일반기억을 인터넷 검색 대신 참조할 터다. 그게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다면.

날것이 소화가 힘든 것처럼 인터넷의 살아 있는 정보에는 인지능력이 소모되니 피곤하다. 일반기억을 남이 추려서 떠먹여 주면 편하다. 낡아버린 정보일 수도 있지만 편하면 그만이다. 물론 유통기한이 지났을 수도 있고, 첨가물이 잔뜩 들어 있을 수도, 근본적으로 썩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전의 판올림처럼 갱신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인터넷이 발견되기 전까지 익숙했던 방식처럼.

딥시크의 등장과 품질은 그러한 미래를 엿보여주고 있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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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