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단장된 미국 백악관 인터넷 홈페이지 메인 화면/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지난 1월 14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는 ‘아세안이 몇 개 회원국으로 이루어졌는지’ 답하지 못해 전 세계 조롱거리가 됐다. 아세안 회원국은 단순하게 웃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조만간 미국에 패싱(무시) 당할 아세안의 미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 체제(2017~2021) 동안 아세안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2017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한 처음이자 마지막 아세안회의였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면 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대신 참석하는 것이 관례지만, 2019년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회의에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안보 보좌관을 보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7개국 정상은 미국과 회담에 불참하며 강하게 불만 표시를 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본부에 주재해야 하는 미국 대사도 임기 내내 임명하지 않았다.
트럼프 양자 협상으로 미국 이익 극대화 꾀해
트럼프는 왜 이렇게 아세안을 무시했을까? 싱가포르의 싱크탱크인 유소프 이삭 동남아시아연구소는 트럼프 2.0 체제를 앞두고 아세안 전문가 6명과 함께한 ‘트럼프 복귀와 아세안-미국 관계에 대한 대담’ 내용을 지난 1월 2일 공개했다. 이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자주의 협정보다는 양자 협정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여러 나라 연합체와 공동으로 협상하기보다는 개별로 협상해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처럼 트럼프는 아세안 집단공동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개별 국가’ 베트남과는 경제적·군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교류를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역사적으로 아세안에서 중국과 가장 대척점에 있고,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베트남을 적극 옹호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동해 영유권과 자주권을 지지하며 미 해군 구축함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공섬 주변 12해리 이내를 항해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국제 해양법에 따라 이 지역이 중국의 영토가 아닌 국제 수역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2024년 10월 10일 라오스에서 열린 아세안과 중국의 정상회담/ASEAN 페이스북 페이지
미국은 해상 안보 역량 강화를 위해 베트남에 길이 115m의 3250t급 고속경비함과 고속정 수십척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통신장비, 해양 탐색 레이더와 감시시스템, 정찰 드론 등을 베트남 해군과 해경에 제공하고 각종 훈련도 지원했다.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교류 절정은 2018년 3월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다낭 정박이었다. 1975년 미국과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미 항공모함이 베트남 영토에 입항한 것은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으면 미 항공모함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무력시위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2020년, 2023년 미 항공모함은 정기적으로 다낭에 입항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베트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트럼프는 베트남을 미·중 무역 전쟁의 대안 시장으로 낙점했다. 베트남은 트럼프 집권기 미·중 갈등으로 가장 큰 경제적 수혜를 입었다.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의 대중국 보복 관세를 피해 베트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베트남과 미국의 무역 규모는 꾸준히 늘어 트럼프 집권기인 2020년 처음으로 미국의 10대 교역국으로 등극했다. 트럼프는 대미 무역 흑자국들에 보복 관세 폭탄을 부과했지만, 베트남은 언제나 대상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받아왔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세안 전체와 적극적으로 손잡았다. 바이든 행정부 임기 첫해인 2021년 아세안은 뒤늦은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감염병 위협에 관한 우려가 극심했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아세안 끌어안기에 나섰다. 2021년 7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을 연달아 방문해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방문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각종 방위 협력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연이어 방문하며 트럼프 대통령 때 불편해진 아세안 주요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외교 활동을 바탕으로 2022년 2월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하며 ‘아세안이 지역 내 정치·경제·안보 협력의 중심축임을 존중하겠다’고 명시했다. 경제적으로는 아세안이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 일부를 대체할 것이라 인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협력을 약속했다.
미·중 화해 분위기는 아세안에 동전의 양면
이와 함께 아세안이 지역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청정에너지 전환 지원책을 제시했다. 2021년 ‘미국-아세안 기후 미래 이니셔티브’(1억200만달러)를 시작으로 ‘클린 파워 아시아 프로그램’(7억5000만달러), ‘아세안 인도-태평양 포럼’(30억달러) 등 다양하고 큼지막한 선물 보따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트럼프 2.0 체제가 시작되며 아세안 대한 기후변화 대응 지원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화석연료 인프라 개발을 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첫 행정명령으로 파리기후변화 협정에서 다시 탈퇴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2017년에도 파리기후변화 협정에 탈퇴하며 청정에너지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이제 미국의 지원으로 아세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양광·풍력과 같은 청정에너지 사업이 불투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2.0 체제에서 예상 밖의 미·중 화해 분위기는 아세안에 안도감과 위기감을 동시에 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취임식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청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틱톡 금지 유예’와 같은 상징적인 조치를 했다. 지난 1월 18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취임 100일 이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는 등 적극적인 화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아세안의 앞마당인 남중국해에서 안정감을 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세안이 미국과 중국의 주요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간 미·중 갈등 속에서 부각된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감소할 수 있다. 또한 그간 미·중 양국에서 받아왔던 경제적·외교적 지원은 대폭 축소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2.0 체제에서 아세안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