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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2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2024년 12월 22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2024년 12월 3일, 하루의 시작은 평범했다. 조기 출근 당번인 터라 업무를 일찍 시작했다.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여야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졌다. 지난밤 정치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게시글 몇 개를 기사로 썼다. 점심 즈음엔 민주당이 공개한 ‘명태균 게이트’ 녹음파일 기사를 썼다. 한낮 돌발상황은 없었고, 오후 4시를 조금 넘겨 퇴근했다.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국회 인근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오후 9시 30분쯤 자리가 파했다. 여의도를 떠나고 얼마 뒤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후 10시 30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카카오톡 메신저는 불이 났다. 그날 이후 국회 안팎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휴일 없는 연속 근무가 2주간 이어졌다. 대통령 2차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서야 주말 아침의 여유를 되찾았다. 2025년 1월 15일, 윤 대통령이 체포되면서 마침내 한바탕 소란이 끝난 느낌이다.

계엄 이후 지난 43일을 이제야 곱씹는다. 파편화된 기억을 한데 이어 붙일 여력이 없었다. 내란·체포·사살 등 무시무시한 말이 떠돌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찰나에 만난 귀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계엄 당일 택시가 국회에 다다랐을 때 정문은 경찰과 시민이 뒤엉켜 접근이 어려웠다. 안절부절못하던 내게 기사님은 “어떻게든 (국회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곧장 핸들을 꺾어 국회 남쪽 제3문으로 향했다. 그곳은 비교적 한산했고, 경찰은 출입증을 확인한 뒤 순순히 출입문을 열어줬다. 한참 뒤에야 그 직후 국회가 완전히 봉쇄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엄 해제를 위한 본회의가 열리던 때엔 회의장 옆 통로에 꼼짝없이 갇혔다. 통로 한쪽엔 계엄군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2m 높이 ‘집기 벽’이 놓였다. 반대편엔 계엄군 10여명이 대기했다. 무장한 군인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기자는 나뿐이었으나 무섭지 않았다. 함께 있던 2명의 야당 보좌진 덕분이다. 이들은 “결국 아랫사람들만 책임지게 된다”며 계엄군에 퇴각을 설득했다. 마지막 1명의 계엄군이 떠날 때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통로를 빠져나가며 “고생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외에도 많은 염려와 다정함이 스쳐 갔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날, 여의도공원에 함께 간 친구는 핫팩부터 휴대용 방석, 물, 보조배터리까지 준비해 내게 건넸다. 소녀시대의 곡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진 그날 광장에서 이름 모를 이로부터의 먹거리 나눔은 예삿일이었다. 가족과 지인의 안부 연락은 수없이 많았다. 한동안 국회 일대 카페와 식당에는 ‘선결제가 소진됐다’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2030 여성이 주축이 된 응원봉 시위대가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농민들과 연대해 서울 남태령고개를 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광장에는 연대의 깃발이 휘날렸다.

윤 대통령은 체포 직후 공개된 담화에서 “우리 청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었다며 계엄을 재차 정당화했다. 틀렸다. 그가 재임 기간 남긴 교훈은 딱 하나다.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는 명제가 참이란 것. 결국 사랑이, ‘우리’가 이겼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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