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역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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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

수탈한 곡식 300만석을 쌓아놓은 역경성은 10겹의 참호로 둘러싸여 있었다. 참호 뒤에는 각각 5~6장(12~14m) 높이의 벽을 세웠고, 그 위에는 수천 개의 망루를 세웠다. 공손찬은 중앙에 있는 역경루에서 생활했는데 이 망루는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다.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원소군의 8년간의 포위 공격을 버텨냈다. 공손찬은 역경루에 철문을 세우고 7세 이상의 남자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고, 그의 첩들만 출입하도록 했는데 모든 문서는 누각에서 줄을 내려서 받았다. 공손찬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되자 부하들이 하나둘 원소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서기 199년 원소군이 판 땅굴에 의해 역경성은 함락된다. 성이 함락되자 공손찬은 역경루에 불을 지르고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인 후 자결한다.

몰락한 군주의 은신처가 된 한남동 관저의 풍경은 역경루를 방불케 한다. 정문에는 대형 버스 7대로 차 벽을 세웠고, 외벽에는 50㎝ 길이의 철침을 박은 철조망을 둘렀다. 공손찬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지 않을까. ‘땅굴을 조심해!’

이 글을 쓰는 시간 한국의 시민들은 대통령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 사람은 겹겹이 포위된 요새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이다. 몰락한 군주의 은신처가 된 한남동 관저의 풍경은 역경루를 방불케 한다. 정문에는 대형 버스 7대로 차 벽을 세웠고 외벽에는 50㎝ 길이의 철침을 박은 철조망을 둘렀다. 공손찬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지 않을까. ‘땅굴을 조심해!’

기세등등하던 공손찬이 역경루에 틀어박히게 된 사연은 기세 좋게 용산으로 이전한 윤석열이 21세기판 역경루를 쌓게 된 사연과 닮았다. 온갖 소인배와 점쟁이를 기용했던 최악의 용인술과 백성의 고통을 외면한 채 음주 향락에 빠졌던 권력자의 말로. 두 사람이 몰랐던 것은 역경루가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그런 거로는 권좌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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