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어떻게 극우를 제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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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 1월 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해 12월 3일 내란 사태 직후에는 국민의힘과 주변 세력 모두 주춤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열을 적극 방어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들은 제도 정당이기를 포기하고 내란 세력의 일부가 돼버렸다. 지금 그들이 쏟아내는 말 중 멀쩡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사실 왜곡, 거짓, 궤변, 헛소리뿐이다. 국민의힘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안정화와 정상화를 위해서는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제거란 어떤 의미인가?

극우와 보수의 구별

일단 보수와 극우를 구별하자. 보수(conservative)는 말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다. 공동체의 기존 질서와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정치이념이 보수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와 함께 출현했고, 지금도 세계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주류 이념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반면 극단적 우파 또는 우파 극단주의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파괴다. 그것은 파시즘과 나치즘의 유산에서 태어나 여성, 이주민, LGBTQ 등을 향한 증오를 퍼트리며 성장한다. 많은 나라에서 보수(우파)와 극우는 구별된다. 보수는 지키려 하고, 극우는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공화당과 트럼프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유럽의 전통적 우파는 극우와 분리되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 서구 민주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위험 중 하나는 보수와 극우의 구별이 흐릿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애초에 이 두 가지가 분리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해서 한국에 있었던 것은 늘 극우였지, 보수가 아니다. 최근 20년간 이른바 ‘보수 정당’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수시로 이름과 로고를 바꾸며 변화를 약속했지만, 이들이 공동체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렸을 뿐이다. 이번 내란 사태가 그중 최악이다.

한국과 서구의 극우는 모두 민주주의의 파괴를 지향하지만, 이 둘을 같은 범주로 묶기는 어렵다. 서구의 극우는 오랫동안 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돼 있다가 최근에 극단적 이념을 무기로 삼아 주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극우는 주류의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 군사독재 시기에 형성된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일 뿐, 일관된 이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거대 양당 체제가 굳어진 한국에서 극우를 제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론 국민의힘을 제거하고 더불어민주당만 남기자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설사 그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지지 세력은 그대로 있으니 이름만 다른 극우 정당이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극우의 제거란 극우가 배제된 정당 질서의 구축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질서는 극우와 분리된 보수의 등장 없이는 만들어지기 힘들다(물론 보수나 우파라고 불리는 이념을 배제하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으로만 구성된 정치 지형을 상상해볼 수 있겠지만, 현실에 존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헛된 희망처럼 보인다. 그동안 여러 사람이 이른바 ‘합리적 보수’ 운운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그 비슷한 게 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왜 한국에는 극우와 분리된 보수 정당이 존재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한국 민주주의의 거의 모든 문제가 함축돼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극우를 제거하는 방법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헛소리하는 자는 정치적 대화의 장에 들어올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는 보수와 극우를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보수는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합리적 언어의 표준을 존중하지만, 극우는 그런 표준을 무시하고 파괴한다. 한국의 극우 정당은 이런 경향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극우와 분리된 보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저 원칙에 충실한 보수 지지층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극우 지지층만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인이 자기 이익을 위해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건 한국에서 흔한 일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의 헛소리에는 관대하고, 반대하는 측의 헛소리에만 비난을 퍼붓는 시민은 어느 진영에나 많다. 그동안 민주당 정치인들이 내뱉은 거짓과 궤변도 차고 넘친다. 헛소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정당 정치의 원칙으로 명확히 작동하지 않는다.

‘정당은 명확한 이념과 국가 운영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다. 한국의 극우는 단 한 번도 이런 원칙에 기초한 정당을 수립한 적이 없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군사독재정권의 계승자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극우와 분리된 보수가 존재하려면, 이러한 정체성과 철저히 단절하고, 자기 고유의 이념을 구축한 정치 세력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당 정치 일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념과 비전의 부재는 극우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정체성 역시 이념이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통해 형성된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인적 계보에 있다. 어떤 이들은 민주당에 자유주의나 좌파 따위의 딱지를 붙이는데, 어림없는 소리다. 임신 중단에 관한 입장이 없는 자유주의자, 차별 금지에 무관심한 좌파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국민의힘 반대’ 외에 민주당의 지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한국 정치를 ‘이념 과잉’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독재 권력의 상속자들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계승자들이 치열하게 대립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 이념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마디로 극우와 분리된 보수가 등장하려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자는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원칙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이런 원칙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지 않는 한 보수는 등장하기 힘들고, 극우는 계속 존속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선거를 통해 극우를 제거할 수는 없다. 대선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의 당선을 최대한 저지하더라도,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 상당수의 국회 의석을 차지할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집권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난장판이 벌어질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기초한 헤게모니 질서를 구축하고, 이 질서가 정치적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제대로 된 규범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관계가 무례한 자를 배제하듯이, 파괴적 세력을 배제하는 정당 정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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