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글루미 선데이>·연극 <타인의 삶> 등
미로 같은 길을 지나 객석과 무대가 연결된 넓은 공간에 이르렀다. 중앙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커다란 스크린이, 한쪽 테이블 위에는 먹거리가, 원형으로 둘려 있는 의자에는 방석과 봉제 인형이 놓여 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파티룸이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천장에 매달린 줄에 외투를 걸고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기묘하다. 안쪽에 모여 앉은 관객들과 뒤에 걸려 있는 외투들의 조합이 마치 ‘산 자와 죽은 자의 회합’ 같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김수정·전웅 구성·연출, 극단 신세계 공동창작)은 티켓 판매와 동시에 전 회차가 매진됐다. 소규모 ‘파티극’과 ‘망각댄스_ 4.16 10년’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궁금해서다. 중3 아이 손을 잡고 들어선 공연장에는 관객 수만큼이나 많은 창작 출연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관객 한명 한명 감정 상태를 돌보기 위한 배려다. 사전에 문자로 공지돼 관객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창작진들이 준비한 대본을 순서대로 낭독하며 ‘파티극’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상식에 관해 묻는 파티극과 감청극
대본은 이미 알려진 팩트 중심의 나열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부터 2024년 12월 말 공연 당일까지의 대규모 재난과 참사,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위정자들의 대처를 짧게 기록했다. 연극적인 요소는 연도가 바뀔 때마다 당시 유행 가요가 나오며 화려한 조명이 등장하는 정도다. 관객과 출연진은 스트레칭도 하고 물도 마시면서 쉬엄쉬엄 낭독에 임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도가 진행될수록 평온했던 단체 낭독은 거대한 드라마 극으로 바뀐다. 관객 각자의 경험과 배경, 문제의식 등이 울먹이거나 분노하는 발성과 표정,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태도를 통해 공유되면서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창작 초연 연극 <타인의 삶>(손상규 각색·연출, 이단비 드라마터그, 카입 사운드, 김종석 무대, 김형연 조명) 역시 현 시국에 대한 풍자와 상식적인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입소문을 타 연일 매진이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동명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원작을 배우이자 연출가 손상규가 직접 각색해 초연을 올렸다.
비밀경찰과 감청 전문가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던 1984년 동독, 비즐러(윤나무·이동휘 분)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벽한 사회주의자다. 연인관계인 작가 드라이만(정승길·김준한 분)과 여배우 마리아 질란트(최희서 분)를 감청하던 중 동독 장관 브루노 햄프(김정호 분)의 비행(非行)을 알게 된다. 생존을 위해 브루노에 성적으로 부역하는 마리아의 고통과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드라이만의 현실에 고뇌하던 비즐러는 어느새 이들을 비호하는 역(逆)감청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무대는 6개의 의자와 몇 개의 간단한 소품이 전부다. 명확한 무대예술과 조명디자인, 강력한 캐릭터성과 전달력은 관객을 사로잡는다. 감청 행위를 여러 각도의 조명을 활용해 거대한 그림자극으로 연출한 부분은 비밀경찰에 대한 공포감을 극대화한 명장면이다. 독일 통일 이후 생존한 드라이만이 자신도 감청을 당했고, 동시에 보호받았음을 깨닫는 순간 역시 압권이다. 그의 집 천장과 벽에서 쏟아지는 폐쇄회로 라인들이 똬리를 튼 뱀처럼 바닥에 꿈틀거리고 비즐러가 각색한 감청 기록 문서가 산더미처럼 쏟아진다. 연극이기에 가능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창작 초연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성종완 작·작사, 김달중 연출, 김은영 작곡, 남경식 무대, 조철민 조명)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자의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헝가리 피아노 연주자 셰레시 레죄가 1933년 발표한 노래 ‘글루미 선데이’에 얽힌 실화가 바탕이다. 동명의 1999년 영화(롤프 슈벨 감독·닉 바르코프 원작)와 닮았으나 한국적인 창작 뮤지컬로 재해석돼 상징과 은유가 가득하다.
19세기 중반 헝가리 부다페스트 14구역. 요리 솜씨가 뛰어난 자보(최재웅·김종구·정문성 분)는 아름다운 집시 연인 일루나(이정화·허혜진·이지연 분)와 레스토랑을 연다. 피아노 연주자 안드라스(정민·유승현·홍승안 분)는 일루나에게 반해 즉석에서 곡을 만들어내고 ‘글루미 선데이’라고 이름 짓는다. 자보와 일루나는 그를 환영하고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스(이진혁·반정모·홍기범 분) 역시 일루나에 반해 청혼하지만 거절당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자보가 살려낸다. 자보의 레스토랑에 유명인들이 드나들면서 안드라스의 곡은 음반으로 발매돼 인기를 끌지만 청춘의 자살을 유도한다는 오명을 쓴다.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의 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고 독일 장교 한스는 레스토랑을 점거하며 압박한다. 안드라스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고 일루나는 자보를 살리기 위해 한스에게 모든 것을 내준다. ‘글루미 선데이’의 음률에 맞춰 작품은 시종일관 우울하고 느리게 진행된다. 어두운 조명과 안드라스의 피아노 연주는 당시 부다페스트 자보 레스토랑으로 시공간을 옮겨 놓는다. 회색조 미장센의 유일한 빛은 일루나와 대여섯 개 테이블 위에 놓인 꽃장식이다. 순수하고 평온했던 일상에는 붉은 꽃이, 위기와 죽음이 이어지는 과정에는 점차 흰 꽃이 놓인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을 통해 관객들은 두 번의 탄핵 정국과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떠올리며 깨닫는다. 연이은 사회적 재난은 정치권의 무능한 원인 규명과 대처에서 싹트는 악순환임을. 출연진들은 공연 말미, 이 위험하고 답 없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생존 중인 관객을 위한 축하 파티를 연다. 희생자들을 향한 역설적인 애도의 퍼포먼스다. 출연진들이 환호하며 ‘생존 축하 파티’를 진행할수록 관객들은 오열한다. 분노와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말 그대로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를 위무’하는 ‘파티극’이다.
더불어 옮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행동에 옮긴 한 비밀경찰의 작은 항거이자 연대를 다룬 <타인의 삶>과 각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여러 결단을 담아낸 <글루미 선데이>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맞는 우리들의 심연 어딘가와 맞닿아 있다. 새 을(乙)과 뱀 사(巳)는 서로 만나 상충하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변혁과 조화를 끌어낸다는 초심의 글자들이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은 상연이 끝났다. <타인의 삶>은 1월 19일, <글루미 선데이>는 1월 26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