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은 내적 위협이 발생할 때 뚜렷이 드러난다. 윤석열의 내란 직후, 한국 시민이 보여준 반응 속도와 강도를 보라. 세상 어디에도 이런 강력한 방어 장치를 갖춘 민주주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감탄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불과 2년 전 윤석열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도 한국 시민이었다. 외부의 폭력이 개입한 적도 없고, 선거 부정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인민의 일반 의지는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해 그를 선택했다. 물론 ‘난 그를 찍지 않았다’고 원망 어린 항변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권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결정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된 자가 2년 뒤에 군사쿠데타를 시도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민주주의에서 상상 가능한 최악의 악몽은 무엇일까? 광인(狂人)이 국가수반으로 선출되는 상황 아닐까? 정상적 민주주의는 결코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인물이 국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증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벌써 두 번째다. 2013년에는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 꼭두각시를 청와대로 보냈고, 4년 뒤에 탄핵했다. 2022년에는 과대망상과 음모론에 빠진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2년 만에 다시 탄핵하는 중이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곳에서도 권력자의 부패나 무능은 흔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전진이 아닌 원상회복
한국 민주주의는 뒤처리 전문이다. 위협이 발생하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하지만, 위협 자체를 예방할 역량은 없다.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망나니가 만든 난장판을 정리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망나니의 등장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면, 이걸 과연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직후, 미국 정부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부심을 느껴도 되는 걸까? 사실 그것은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회복력 아닌가? 마냥 뿌듯해하기에는 뭔가 멋쩍은 상황이다.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때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정상적인가? 한국은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가?
지난 12월 3일 이후의 상황을 보며, 적지 않은 사람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완전히 다르다. 군사 정권은 역사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장애물이었고,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이 곧 민주주의를 향한 전진이었다. 반면 박근혜와 윤석열 탄핵은 앞마당에 떨어진 오물을 치우는 작업에 가깝다. 이런 작업의 목적은 전진이 아니라 원상회복이다. 더럽고 귀찮은 일을 처리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될 뿐,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지는 않는다. 윤석열 파면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별개의 문제다. 지난 8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2017년 박근혜 파면이 확정됐을 때, 모두가 ‘시민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 승리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오랜 정당 정치를 거쳐 대권주자가 된 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가 알고 보니 ‘비선 실세’의 꼭두각시였다. 그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난장판이 만들어졌는데, 한국 시민은 다행히 그 뒤처리를 무사히 마쳤다. 승리가 이런 뒤처리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2016년의 시민은 승리한 것이 맞다. 하지만 승리가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국 시민은 결국 패배했다고 말해야 한다. 2024년이 2016년의 패배를 증언한다. 비슷한 난장판이 다시 벌어졌고, 이번에는 군사쿠데타라는 훨씬 더 심각하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져왔다.
승리의 의미
지난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또다시 ‘시민의 승리’를 자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번에는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리고, 윤석열이 파면되고, 그와 주변 일당이 내란죄로 처벌받고, 정권 교체가 완료되면, 그것이 승리일까? 이번에도 승리가 뒤처리의 성공을 의미한다면, 이 모든 절차가 끝난 후 마음껏 시민의 승리를 기뻐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지 고심하는 사람이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난 후,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성과 안정성이 비로소 보장된 다음에야 승리를 자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성과 정상성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간에 큰 사고 없이 국가를 운영하다가 임기를 마무리하고, 선거를 비롯한 정상적 절차를 통해 권력 구조가 교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당선된 다섯 명의 대통령 중 세 명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됐다. 그중 한 명은 파면됐고, 또 다른 한 명은 헌재 결정을 앞두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쫓겨난 것은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 한국 민주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정치인을 걸러내는가?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에 관해 한국 시민들은 최소한의 공통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모두의 관심이 점차 다음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탄핵 이후 더 큰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변화의 수준이다. 다음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하면 될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지난 8년의 시간이 보여준다. 다음 정권에서 더욱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 될까? 그런 시도는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겠지만, 개별 정부의 정책으로 한국 민주주의 자체를 바꿀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교체하는 수준의 변화가 필요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게 문제의 해결책일지, 문제를 다른 문제로 교체하는 꼼수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 지금은 더욱 근원적인 수준의 변화를 계속 상상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민주주의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수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을지 모른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