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불쑥불쑥 화가 납니다. 집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갈 때, 퇴근길 지하철에서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하는 승객들을 볼 때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승객들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닙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작지만 소중한 일상을 모든 이들에게서 빼앗으려 했다니’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화가 납니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끝났지만, 이미 시민들의 일상은 무너져내렸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까지 제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는 자기 전에 소설 <삼체>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삼체>는 중국 작가 류츠신이 쓴 SF소설입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삼체>를 읽을 때는 (워낙 규모가 커서) 백악관의 일도 사소하게 보인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과학 이론이 수시로 나오지만, 읽다 보면 책 밖의 일들을 짧게나마 잊어버릴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삼체>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책 속에서 지구인들이 소멸위기에 처해도, 외계인과 전쟁이 벌어져도 책 밖에서, 그러니까 제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책을 잡았다가도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뉴스 사이트를 ‘새로 고침’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다 잘 해결되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저는 내심 불안합니다. 밤사이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야당의 윤 대통령 탄핵 추진에 맞서 ‘질서 있는 퇴진’을 말했습니다. 탄핵은 “실제로 가결될지,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에 대해 불확실성이 있기”에 “시기를 정하는 조기퇴진이 더 나은 방안”(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계엄 선포를 했던 사람이 아직도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것만큼 불확실한 일이 있을까요. 그나마 일부라도 대통령 탄핵으로 돌아서 동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주간경향 지면 대부분은 ‘12·3 비상계엄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차지했습니다. 외부 필자들이 보내는 칼럼도 비상계엄 사태라는 주제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느 시절이라면 한국인의 축제이기도 했을 지난 12월 10일(현지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도 시민들은 마음껏 즐기지 못했습니다. 한강 작가조차 시상식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여전히 뉴스를 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하루빨리 우리의 일상이 돌아오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마음 놓고 <삼체>를 다시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대통령 탄핵은 그 길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