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란으로 이어진 ‘윤석열과 김용현의 브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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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6월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용현 당시 경호처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6월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용현 당시 경호처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군부의 쌍두마차

‘12·3 비상계엄 사태’의 키맨(핵심 인물)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육사 38기)은 육사 1년 선배인 신원식 청와대 안보실장과 함께 윤석열 정권의 군부를 이끈 양대 축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군부의 ‘강경 매파’를 대표한다. 그리고 김 전 장관은 정부 내에서도 대표적인 충성파 인사다. 그는 2022년 3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 부팀장을 맡아 대통령실 이전 실무를 맡았다. 이후 윤석열 정부의 초대 대통령실 경호처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됐고, 지난 12월 10일 형법상 내란(내란 중요 임무 종사) 및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김 전 장관과 신 안보실장 모두 노무현 정권이 중용한 ‘PK 군맥’ 출신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은 앞서 집권한 김대중 정권의 ‘호남 군맥’을 대거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PK 출신들이 군부의 신주류를 이뤘다. 경남 마산 출신인 김용현 당시 대령도 노무현 정권 때 별을 달았다.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로 돌변했다. 육군 제17사단장(소장)으로 부임한 그는 인천 지역 예비군 훈련장에 ‘김 부자의 목을 따서 3대 세습 종결짓자’, ‘세습 독재 도려내어 북한동포 구해내자’ 등의 현수막을 걸도록 지시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머리 위로 총구가 겨눠진 현수막도 훈련장 곳곳에 설치하도록 했다. ‘장병 정신교육에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자 위기의식에서 나온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이명박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군사작전에서 최고 전문가로 꼽혔다. 명석한 판단 능력의 소유자로 자타가 공인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박한 평가를 하는 선배 장군들이 적지 않았다. 1970~1990년대 대간첩 작전과 같은 임기응변식 ‘팃포탯’(맞받아치기) 군사 대응에는 능하지만, 전구(戰區) 작전에서는 전략적 사고가 미숙하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윤석열 정권에서 군부 최고 실세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내란죄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은 그의 성장 과정과 성격을 보면 알 수 있다. 야망을 품은 출세 지향적 인사인 김 전 장관은 상관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는 ‘예스맨’ 군인이었다. 김 전 장관은 경호처장 시절부터 윤 대통령의 모든 말에 “맞습니다, 대통령님!”이라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에서는 김 전 장관이 대통령의 말에 한 번이라도 반대한 걸 본 기억이 없었다는 전언이다.

그는 결론이 난 문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핵심가치 구호처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이다. ‘안 되는’ 이유를 버리고 결과를 내는 ‘방법’에만 몰두한 군인이었다. 그 부작용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통령실 졸속 이전과 비상계엄 강행은 모두 그 부작용을 무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불도저식 업무 추진’에 불만을 내비치는 부하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거친 언사를 퍼부었다. 김 전 장관의 업무 스타일 등이 윤 대통령과 싱크로율 99%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가 3성 장군(중장) 진급까지 육사 38기 동기생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합참 작전본부장(중장) 시절 집무실에 야전 침대를 갖다 놓고 거의 24시간 근무하면서 현행 작전에 대비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얘기했을 때도 “안 됩니다”라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가능한지를 설명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비상계엄의 불법성과 계엄군이 국회 장악에 실패했을 경우 어떤 후과가 따르는지는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월 1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6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과 사열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 10월 1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6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과 사열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축구선수’에서 ‘장군’이 된 소년

‘소년 김용현’은 원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선수가 되고자 했다. 아들이 운동선수가 되길 바라지 않았던 부친은 그를 서울 충암고로 강제 전학시켰다. 그는 충암고 7회 졸업생으로 윤 대통령의 고교 1년 선배다. 김 전 장관은 고교 시절 학도호국단장을 지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학도호국단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이 ‘학원의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한다’며 학생회 대신 만든 조직이었다. 당시 학도호국단장은 학생회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전 장관은 육사 38기 동기생 가운데 선두주자였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급에 나름으로 어려움을 겪고 절치부심했다. 일 처리가 철두철미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 그에게도 군 생활은 진급이라는 ‘정글’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가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있을 때 본부장실에서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은 적이 있다. 김 전 장관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동안 군 인사에서 자신이 받은 불이익을 두고 울분을 터뜨렸다. 당시 그는 유력한 육군 대장 진급 후보자였으나, 한민구 장관이 중장 ‘3차 진급자’인 A장군을 측근이라는 이유로 대장으로 진급시켰다며 속을 삭이고 있던 터였다. 앞서 그는 2007년 준장 1차 진급, 2010년 소장 1차 진급에 이어 2013년 10월 인사에서도 육사 38기 중 단독으로 중장 1차 진급을 한 선두주자였다. 중장 보직도 대장 진급 0순위로 꼽히는 ‘수방사령관-합참 작전본부장’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2016년 9월 군 인사에서는 A장군이 대장 진급과 함께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 김 작전본부장은 군 인사의 부당함을 장시간 토로했다. 그는 “수방사령관 시절 통합방위 회의에서 군 측 참석자로서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났을 뿐인데 마치 긴밀한 관계인 ‘박원순 사람’인 것처럼 음해에 시달렸는가 하면, 진보 정권에서는 김민배 TV조선 전무의 절친이라고 인사 검증을 한다”며 억울해했다. 그러나 정작 윤 정권의 실세가 된 후 그는 ‘충암파’나 ‘용현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편향된 군 인사를 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 김 전 장관(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은 가장 강력한 합참의장 후보자였다. 김 전 장관의 육사 후배인 청와대의 A장군과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최측근 B장군이 그를 강력히 추천했다. 그러나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육군 제17사단에서 일어났던 ‘영웅 조작사건’을 들이밀며 급제동을 걸었다.

17사단은 2011년 소속 병장의 익사 사고를 후임병을 구하고 대신 사망한 영웅담으로 조작했다가 언론 보도 등으로 사실이 탄로 나 물의를 빚었다. 민정수석실은 “김용현 당시 사단장이 병장 익사 사고를 ‘영웅담’으로 조작 지시했다”고 한 당시 사망자 소속 부대의 연대장이었던 이모 대령의 주장을 받아들여 김 전 장관의 대장 진급을 막았다. 나중에 이 대령은 대법원에서 무고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김 전 정관은 결국 대장 진급에 실패하고 2017년 11월 전역했다. 전역 이후 2021년 윤석열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새 정권 출범과 함께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의 ‘잘못된 브로맨스’가 시작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극과 극을 달리는 ‘롤러코스터’를 함께 탔다. 12월 3일 ‘브로맨스의 몰락’으로 가는 롤러코스터에는 김 전 장관의 충암고 10년 후배인 여인형 방첩사령관(육사 48기)도 탑승했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anbo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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