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대한 실망과 엄중한 시국에 분노…SNS 시대에 부활한 대자보
신상털이 등 우려로 익명이 대부분…학내의 공론장 다시 열릴까 주목
“동국대학교 시국선언은 예정대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12월 3일 밤 11시 48분,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학가 시국선언을 취재하기 위해 만났던 동국대 학생 홍예린씨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동국대 학생들은 일주일 전부터 계획했던 시국선언을 하루 앞두고 ‘12·3 비상계엄 사태’라는 중대 변수를 맞았다. 계엄사령부가 ‘처단’을 언급하면서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한 지 불과 20여 분 만에 동국대 학생들은 예정대로 시국선언을 진행하기로 했다. 국회에 군 병력 투입이 시작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송된 짧은 문자메시지는 사뭇 비장하게 느껴졌다.
홍씨는 지난 12월 4일 통화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에 이미 연명하겠다고 밝힌 분 중 일부는 이름을 빼달라고 했고, 어떤 분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했다. 추가로 연명하겠다는 분도 있었다. 연명인 숫자가 요동을 쳤다. 무섭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엄이 유지돼 시국선언을 하다가 체포된다고 하더라도 이 지경이 됐는데 대학생이 목소리를 안내는 게 더 부끄러울 것 같았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계엄령이 해제된 이날 동국대 학생 122명은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침묵하는 대학생’이라는 세평과 달리, 대학가는 지난 10월 말부터 서서히 끓고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명태균 게이트가 불거지자 소수의 학생이 학내에 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였고, 점차 여러 대학으로 번져갔다. 이중 상당수는 익명으로 작성된 대자보였다. 무엇을 사과했는지 알 수 없는 지난 11월 7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 이후 확산 속도는 빨라졌다.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 본격화됐고, 학생 사회에서도 시국선언을 제안하는 실명 대자보가 하나둘 등장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대학가의 시국선언이 전방위적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나왔다. 그리고 ‘계엄의 밤’ 이후 대학가의 분노는 임계점을 훌쩍 넘어선 듯 보인다. 12월 4일 하루 만에 여러 대학에서는 다수의 대자보가 붙었고, “12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이자”는 구호가 퍼졌다. 비상계엄 사태가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교내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왔던 최초의 미약한 목소리는 그 마중물 역할을 했다.
온라인 소통이 대중화된 시대, 대학가에 전통적인 매체인 대자보가 다시 등장하게 된 까닭을 살펴봤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잇단 실망과 좌절, 시국의 엄중함은 학생들이 대자보를 쓰는 동력이 됐다. 학내의 주요 소통창구가 된 온라인 커뮤니티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공론장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한다는 점도 학생들이 대자보를 꺼내든 원인이 됐다. 상당수 학생은 정치적 의견 개진을 당파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학내 분위기 속에 대자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감췄다. 대학생들의 대자보를 통해 대학에서, 혹은 사회에서 위축된 공론장의 문제도 들여다봤다. 이것은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 7개월을 관통하는 문제였던 ‘불통’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커뮤니티보다 대자보?
“윤석열의 죄가 매우 많아서 하나씩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라거니와 이미 두루 알려져 있어 분명하지 않은 바가 없으므로 간단히 적는다.”
지난 11월 17일 서울대에는 ‘국민의 적 윤석열을 타도하자’는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는 ‘바이든-날리면’ 사건과 채 해병(상병) 사망 사건에서 정권이 보여준 태도, 연구개발 예산 삭감, 한반도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외교 실패를 빠르게 지적한 뒤 “왕이 되려 하는 대통령이 설 자리는 없다”며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한다. 격정적이면서 예스러운 문체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586세대가 학생을 가장해 붙인 대자보가 아니냐’는 추정도 나왔다. 작성자는 서울대 재학생 두 사람이었다. 이중 생활과학대학 학부생 A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대자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대통령에게 개선을 요구하거나 충고를 하는 것이라면 대자보를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방향의 개선을 요구할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대자보는 보다 엄중한 언어를 갖는다고 봤고, 퇴진을 요구한다면 대자보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시국의 엄중함을 알리는 매체였기에 대자보를 택했다는 얘기다.
현실 세계에서의 진정성 있는 논의를 희망하며 대자보를 붙인 이들도 있었다. 경남대학교 학생 김민지씨는 지난 11월 11일 학교에 명태균 게이트와 대통령의 사과 없는 대국민 담화를 비판하는 익명의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형식상 사과를 했지만,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부분에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김씨는 온라인 공간의 글보다 대자보가 읽는 사람에게 더 호소력 있게 다가갈 거로 생각했다. 그는 “내 주변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다른 학생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전하고 싶었다. 대자보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자보 내용과 관련해 한마디씩 하는 걸 보면서 붙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니까”라고 했다.
대자보는 의도적인 선택인 동시에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대자보를 쓴 학생들은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글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면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끼리 대학 생활 관련 정보를 나누는 대학생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이 대표적이다. 이 커뮤니티는 비대면 강의가 활성화된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대학의 소통 공간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는데 비속어와 혐오 표현, 조롱이 난무한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2022년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청소·경비노동자 형사고소를 계기로 담론장으로서 에브리타임을 고찰하는 강의를 개설했던 나임윤경 연세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에브리타임에서 오가는 언어를 우려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세대가 ‘댓글 세대’로서의 특수성도 있는 것 같다. 소통이 상호작용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이다. 한 번 발화하면 끝이다. 언어가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값어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 사실 그거야말로 반지성이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이런 멸시의 언어가 범람하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하는 대자보를 학교에 붙였던 부산대 학생 라석호씨는 “대자보를 오프라인에만 붙이고 에브리타임에는 아예 올리지 않았다. 저는 에타(에브리타임의 약칭)가 우경화된 커뮤니티라고 본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글을 올리면 작성자를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댓글이 우후죽순 달린다. 11월 초에는 부산 부경대학교에서 윤석열 퇴진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는 일이 있었다.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는데도 에브리타임에서는 ‘좌파 시위대가 갔네’, ‘빨갱이들’이라는 댓글이 달렸다”고 했다.
기우가 아니다. 고려대학교 학생 노민영씨는 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학생 시국선언을 제안하고 지난 12월 2일 고려대생 265명의 뜻을 모아 시국선언을 했다. 이 시국선언문은 “다른 의견을 적으로 간주하며 입을 막는 사회에서 대화와 토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경청과 존중은 사라졌고, 갈등과 분열이 자리 잡았다”며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노씨는 “시국선언을 제안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에브리타임에도 글을 올렸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직접 찾아보지 않았는데 저 개인에 대한 비방 등 별 얘기가 다 오갔다고 하더라. 결국은 시국선언 제안 글이 잘렸고(삭제됐고), 다른 학우가 화답 대자보를 붙이고 그걸 에타에 올린 게시글도 잘렸다. 에타 계정이 정지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학우들을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에타만 보면 아무도 제가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260명이 넘는 학우들이 연명해줬다”고 했다.
까면 털린다, 익명 대자보 시대
이번 대학가 대자보 행렬의 특이점은 초기 대자보의 상당수가 익명으로 작성됐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를 밑도는 상황에서도 학내에서는 퇴진을 촉구하는 의견이 소수일 수 있다는 압박감, 의견 개진이 당파적으로 비칠 것에 대한 우려, 온라인 공간에서 ‘신상털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몇몇 대학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소수의견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드러난 건 지난 11월 중순 동국대에서 발생한 대자보 논쟁이다. 당시 동국대에는 ‘윤석열을 지켜라! 20대 남자…잊지 마라. 너희 제1의 적은 페미니즘이다!’라고 쓴 대자보가 붙었다. 이 대자보에는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면 성범죄 형사처벌이 강화될 수 있다며 남성들에게 현 정부를 사수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내용이 담겼다. 며칠 만에 이 대자보의 곁에는 ‘제발 커뮤(온라인 커뮤니티) 끄고 현생(현실 인생) 좀 사십시오’라는 제목의 반박 대자보가 나란히 붙었다. 반박 대자보는 청년·연구개발 예산 삭감, 채 해병 사건 은폐를 언급하며 “이걸 페미니즘이 했습니까? 윤석열이었습니다”라고 반복해서 지적했다. 두 대자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됐는데, 반박 대자보에 동의하는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여겨볼 점은 논리 비약이 있던 최초의 대자보가 오히려 실명으로 게재되고, 반박 대자보가 익명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실명 공개 여부에는 작성자의 개인의 성향 등이 작용했겠지만, 학내의 지배적 여론에 대한 오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동국대 학생 홍예린씨는 당시 익명으로 반박 대자보를 작성했다. 그는 “최초의 대자보가 학내의 주류 감성이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보고 싶어서 반박 대자보를 붙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익명으로 작성한 이유에 대해 “실명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대학에서 전반적으로 대자보를 실명으로 쓰는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색출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에타에서 신상털이·사이버불링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또 학내 여론이 호의적일 거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실명을 공개했던 최초의 대자보 작성자는 온라인상에서 신상 정보가 공개되는 공격을 받았다.
이런 위협이 온라인에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가 졸업한 창원대의 학생들은 지난 11월 4일 “(명태균) 선배님은 정말 우리 학교의 수치이자 최악의 결과물”이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나 학교 측은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대자보를 무단 철거했다. 11월 11일에는 경남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치적인 의견 개진이 자유롭게 이뤄져야 마땅한 학내 공론장을 학교 측이 나서 위축시키고 있는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오프라인에서도 대자보를 익명으로 작성한 이들에 대한 비방과 대자보 철거 요구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창원대 세무학과 학생 B씨는 ‘세무학과 학생 1’ 명의로 학내에 대자보를 붙였다. 이에 창원대 세무학과 학생회장은 세무학과 이름이 들어가면 대자보가 세무학과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며 대자보 철거를 요구했다. 학생회 집행부 중 한 명은 세무학과 학생들이 모두 사용하는 단톡방에서 “좋X신 같네. 실명을 쓰든가. 장애인X”이라며 대자보 작성자를 비방했다.
대자보를 쓴 B씨는 “붙이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을 걸 우려했다. 대학이라는 공간 자체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기피하고 조금이라도 의견을 꺼내면 어느 편인지로 몰아 물어뜯는 문화가 생겼다. 국정 농단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게 맞는데, 이 정권이 잘못됐다고 하면 마치 다른 정권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로 몰아간다. 정치적인 입장을 꺼냈다는 이유로 공격받지 않는 학교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 의견이 다르면 반박 대자보를 붙여서 소통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공론장 다시 열릴까
학내 공론장에 감도는 엄혹한 분위기가 정치권, 사회와 무관하게 상아탑에서만 자생적으로 발현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권의 교체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대 학생 노민영씨는 “이번 정권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대해 소모적이고, 소용없는 일이라 느끼게 만드는 데 이 정권의 태도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반국가세력이라든가, 대화를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고 했다.
위기는 기회가 될까. 정부의 거듭된 불통과 실책은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는 대학가의 소수의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공론장의 품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지난 11월 말부터 고려대, 경북대, 동국대, 숙명여대, 한국외대, 홍익대 등에서는 실명으로 학내에서 학생 시국선언을 제안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 된 12·3 비상계엄 사태를 지나면서 목소리는 광장의 행동으로 번져가고 있다. 동국대 학생 최휘주씨는 지난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택시를 타고 서울 여의도 국회로 향했다. 최씨는 “가서 막지 않으면 사달이 날까 걱정됐다. 그날 국회 앞에 시민발언대도 만들어졌는데 발언 대기자만 30~40명씩 됐다. 같이 시국을 걱정하는 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생각에 희망을 봤다. 정권의 말도 안 되는 자충수에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이 열린 게 아닐까. 정말 광장에서 희망을 봤다”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