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인간관계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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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한 농부들은 슬슬 가지치기를 준비한다. 나무가 햇빛을 고루 받아 건강하게 자라게 하려면 말라죽거나 길게 늘어진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 제멋대로 뻗어 나가 뒤엉킨 가지는 나무에도 스트레스여서 솎아내야 한다. 그래야 튼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 동료 등과 인연을 맺으며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간다. 이 가운데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만남도 있지만, 갈등하고 고통받는 만남도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가지를 쳐나가는 데만 관심을 가질 뿐, 쓸데없이 웃자란 관계를 쳐내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 관계가 성장을 넘어 성숙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요한 데도 말이다. 물론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면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과 직장을 다니지 않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자연스러운 가지치기가 일어나곤 한다.

인맥은 기회와 정보에 접근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관계의 힘으로 직장생활을 영위했다. 어딘가에 가 닿을 수 있었던 건 관계 덕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추천하고 소개하고 발탁해줬다. 이뿐만 아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내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줬고, 내 부탁을 들어줘서 가능했다.

하지만 얕은 인맥은 아무리 쌓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사람은 많으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모아놓은 명함은 많지만 실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친구는 많지만 진정한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선택하고 집중해서 옥석을 가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취사선택하거나 우선순위를 매기지 않고, 모든 사람과 고루 잘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다 보면 피로감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관계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투입하지 못한다. 산토끼를 쫓다가 집토끼마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가지치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관계를 정리하는 나름의 기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첫째, 상대방과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관계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친하다고 여기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나를 찾고 내가 필요한 때는 만나주지 않는 관계는 끊는 게 맞다. 5 대 5의 관계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10 대 0이나 9 대 1의 일방적인 관계를 용인해선 안 된다. 이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이기 때문이다.

ⓒPixabay, Gerd Altmann

ⓒPixabay, Gerd Altmann

둘째, 내게는 잘해주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몰지각하고 몰염치한 사람과의 관계는 단절하는 게 좋다. 식당에 가서 종업원에게 함부로 하거나 새치기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다.

셋째, 믿을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도 정리 대상이다. 밥 먹듯이 약속을 어기고,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단절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내가 없는 데서 나를 험담할 사람이며,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치고 나를 배신할 사람이다. 이런 관계는 버림을 당하기 전에 먼저 버려야 한다.

넷째, 만나면 푸념과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람, 매사를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접근하고, 장점보다 단점만 보고 이루는 방법보다 안 되는 핑계만 찾는 사람과는 멀리하는 게 좋다. 이런 관계는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기가 빨릴 뿐이다. 만나고 나면 ‘왜 만났지?’ 하는 후회만 남는다.

다섯째, 감정적으로 상대를 조종하려는 사람과의 관계도 잘라내야 한다. ‘너 때문에 내가 힘들다’며 이유 없이 죄책감을 유발하거나, 지나친 집착으로 상대를 통제하려는 사람과의 관계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에너지를 고갈시켜 십중팔구 상처만 남기고 끝나게 마련이다.

가지치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여럿이다. 가장 큰 이점은 정신적·정서적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중요한 관계에만 에너지를 쏟으면 정신적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2018년 미국 심리학회(APA)는 “불필요하거나 부정적인 관계는 스트레스를 가중하고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관계의 가지치기는 나의 발전 방향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줄이고, 나의 성장에 보탬이 되는 사람과의 연계와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소모적 관계가 생산적인 관계로 바뀐다.

아내는 3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좋은 점 하나를 꼽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맺었던 수많은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둔 다음 날,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를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하나둘씩 지웠고, 그 지워진 개수만큼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3000개가 넘던 전화번호 목록이 스크롤 몇 번 내리면 끝날 정도로 단출해졌지만, 이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수많은 경조사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퇴직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다. 이렇게 개운할 줄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정리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과도한 가지치기가 가져올 역효과는 분명히 있다. 갑자기 인간관계가 좁아져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고, 가지치기 과정에서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상대방이 오해하거나 상처받을 수 있다.

어설픈 가지치기로 상대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관계를 정리할 때 가급적 솔직하고 부드럽게 소통해야 하며, 소통의 빈도를 조금씩 줄여나가 상대가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관계를 원만하게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시급히 정리해야 할 상황이라면, ‘이제 나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시간을 갖고 싶어’와 같이 눈치 보지 않고 단호하게 생각을 밝히는 게 좋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버리는 일일지 모른다. 버리는 건 늘 아쉽고 아깝다. 글을 쓸 때도 무언가를 더 넣으려 할 뿐, 빼는 데는 인색하다. 빠진 게 있는 글보다는 뺄 게 없는 글이 더 나은데 말이다. 이제 뺄 수 있는 건 다 빼면서 쓰려고 노력한다. 뺄 것을 과감하게 후려치는 짜릿함이 있다. 최대한 빼고 나면 남은 게 빛난다. 말도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를 줄여야 한다. 불필요한 말은 과감하게 솎아내야 한다. 버리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하물며 인간 사이의 관계쯤이야.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관계가 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인생이 원치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흔들리지 않도록 불필요한 관계는 훌훌 털어내자.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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