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 등
‘청운(靑雲)’은 ‘이상(理想)’을 의미한다. ‘청운의 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기의 보석 같은 가능성이다. 누구나 한번은 큰 포부를 품고 나아간다. 그러나 한국 청년들의 현실은 암울하다. 청년 세대(19∼34세)의 5%인 54만여명이 고립·은둔자(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연구, 2021)에 속한다. 1인 가구 급증과 만연한 전세사기, 주식과 비트코인 급등락 등 불안정한 경제·사회 속 장기화한 고용불안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들 중 ‘청년 고독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매년 늘어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청운의 꿈’을 꾸어야 할 청년세대가 도대체 왜 고독사로 몰리고 있는 것일까? 창작 초연 연극 <붉은 웃음>(김정 연출·하수민 재창작·남경식 무대)은 2024년 11월 은둔·고립 청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시작한다.
<붉은 웃음>은 전쟁의 참상을 세밀하게 느낀 레오니트 안드레예프(1871~1919)의 소설을 2024년 한국에 빗대어 재창작한 1인극이다. 흙이 가득 채워진, 원초적이고 회화적인 무대는 두 개의 시공간으로 나뉜다. 왼쪽은 2024년 한국 청년의 고독사 현장으로 검은 봉지가 산처럼 쌓여 있다. 오른쪽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생환한 러시아 장교의 고독사 현장으로 백지 원고가 쌓여 있다. 12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배우 윤성원은 과거와 현재 청년들의 심연을 여러 캐릭터로 대변한다. 극단적 개인화의 늪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의 광기가 폭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감각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그 시대, 그 캐릭터에 접신한 듯 냉철하고 광적이다.
새로운 양식의 예술적 씻김
2024년 유품 관리사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흙더미 깊숙이 파묻힌 고인의 유품을 발굴하며 그의 고독과 공포를 되새긴다. 무대 뒤 가득 ‘내가 없어지면 누가 날 찾을까,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없음, 먹고 싶은 것 던킨도너츠’ 등 고독사한 청년들의 파편이 여러 필체로 영사된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버스 타고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속내가 드러나자 관객들은 비애를 삼킨다.
러·일전쟁에서 아군끼리 싸워 두 다리를 잃고 말라 죽어간 장교의 동생으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잉크 없는 펜으로 수십장 기록한 형의 ‘백지 절규’를 흡입한다. 각 시공간의 폭력적 현실에 자아를 놓아버린 청년들의 심연은 윤성원 배우를 매개로 강렬한 신체 움직임과 발성을 통해 관객들의 심연과 맞닿는다. 흙더미를 파헤치며 구르거나 박차고 뛰어오르는 현대무용처럼, 혹은 발작처럼 반복되는 움직임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속에서 전환기를 맞는다.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매회 조금씩 다르게 재해석되는 (이승에 맺힌 원한을 씻고 극락에 가도록 이끄는) ‘예술적 씻김’이다.
연극 <전시의 공무원>(오세혁 작·변영진 연출·박성민 무대)에도 특별한 씻김이 등장한다. 여기서 애도하는 대상은 국가가 학살한 민간인과 위선 속에서 꿈을 상실한 주인공이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갑돌(김시유 분)과 갑순(김려은 분)은 일제강점기 공무원으로 살며 회한만 남긴 부모 세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통령 포함 고위 공직자들이 탄 피란 열차에 탑승해 위선으로 가득한 그들의 지시에 따르던 갑돌과 갑순은 보도연맹 명단에 있는 농부들을 학살하라는 지시에 고민하던 중 그들의 무고함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순박한 갑순과 갑돌은 장애가 있는 양민들을 부축하고 서로 부족한 것을 메꾸며 온기 가득한 피란 행렬을 이끌던 중 연합군의 경북 칠곡 다리 폭파 작전에 휩쓸린다.
민간인들이 모두 연합군과 국군에게 학살되는 현장을 목도해야 했던 갑순과 갑돌은 이들을 대신하는 무명천 인형들의 조각난 신체를 이어붙이며 통곡의 씻김을 수행한다. 기밀문서를 보관해 위정자의 기만을 폭로하려 한 갑순에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총구를 겨눈 갑돌의 딜레마도 잠깐,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른다. 출연진들이 관객과 무릎을 맞대며 격렬한 신체 연극으로 풀어낸 비애의 마당극은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는 장엄한 한판으로 애도의 퍼포먼스를 마무리한다.
스크린으로 확장된 청춘의 비애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최양현 작·영상, 이태린 연출)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전북 남원 서도리 출신 스무 살 소년의 꿈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극중극’으로 담아낸다. 첫 장면은 2023년 북 토크 현장이다. 노년의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를 다듬어 출간한 현재의 작가이며 최영우 외손자 이경현(김세환 분)이 최영우(김세환 1인2역)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하며 본격적인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 공간으로 전환된다. 사방에 라이브 캠을 들고 있는 카메라맨이 돌아다니고 배우들과 건물 및 인체 모형을 섬세하게 재현한 디오라마(diorama)와 무대 위 등장인물, 자료화면이 스크린에 실시간 상연된다. 일반 연극과 달리 등장인물의 감정이 시시각각 클로즈업돼 80여년 전 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와 재판정, 태평양 함선이 생동감 있게 와닿는다. 일본 패망과 함께 일본인으로 취급돼 전범 재판을 받고 인도네시아 형무소에 수감된 청년 최영우의 삶은 고향을 떠난 지 5년 만에 피골이 상접해 귀향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창작 초연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천유정·한재림 대본, 천유정 연출, 이나오 작곡, 김장연 영상)는 길버트 아데어의 동명 소설 원작 영화 <몽상가들>(2005)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을 배경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영화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영화 마니아이자 자유로운 영혼인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 미국 유학생 매튜의 자아 찾기 탐색전이 시작이다. 혁명의 물결 속 폭력과 학살을 목도하며 침잠한 그들은 서로를 탐닉하고 방탕에 빠지지만 결국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것을 택한다. 일련의 갈등과 화합, 성찰의 미장센(화면구성)은 무대 전체를 감싼 하얀색 커튼에 영사되는, 시네필(영화광)이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창작진들은 원작 소설에 언급된 영화의 편집 영상을 이용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청년의 방황을 그렸다.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부조리에 저항하는 시위 중 스러진 매튜가 미국인 유학생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원작 소설, 영화와 다른 뮤지컬 창작진들의 재해석이기도 하다.
<붉은 웃음>의 ‘붉은 웃음’은 광기와 허상이 점철된 기괴함이다. 죽은 자 위의 산 자, 산 자 위의 죽은 자가 뒤엉켜 공존하는 인간사에서 <전시의 공무원> 갑순과 갑돌이 반복해서 되뇌며 울부짖는 “밟지 마세요. 아버지가 밟히고 있네. 죽어서도 밟히고 있네”에 담긴 염원은 무엇일까. 나의 선의와 작은 꿈에 대한 바람을 알아달라는 아우성은 아닐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치는 <홀리 이노센트>의 청년들과 꿈에서도 그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시간을 뇌리에 새기며 사는 조선인 최영우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은 오로지 꿈을 향한 자유가 보장된 삶이다. 2024년 11월 현재 한국은 청년들의 소박한 바람에 응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청운의 꿈’에는 짝꿍처럼 따라붙는 요건이 있다. 바로 ‘자중자애(自重自愛)’다. 자기의 몸을 소중히 해 스스로 아끼고 가꾼다는 의미다.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오는 12월 1일, <홀리 이노센트>는 12월 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