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엔지니어 리더십, 동양사학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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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 회계 부정과 관련한 항소심 2차 공판이 열린 지난 10월 14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 회계 부정과 관련한 항소심 2차 공판이 열린 지난 10월 14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삼성전자를 위해 이 말을 변주하자면, 성공하는 첨단기술기업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난관을 겪는 기업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어하는지 모른다. 저마다의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지만,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을 추리는 일은 그렇지 않다. 삼성전자의 위기를 논하는 수많은 기사 속에서, 한국 언론은 현재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선진국의 첨단기술기업이 보여주는 공통점을 자주 무시하고 국민의 시각을 왜곡한다. 삼성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그 차이를 알고 있어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현실 인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젠 말할 때가 됐다. 첨단기술기업을 표방하는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는 동양사학을 전공했다.

잘나가는 첨단기술기업의 리더십엔 공통점이 있다

기술기업의 리더가 반드시 엔지니어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국에도 기술기업의 리더십을 경영학이나 재무전문가에 맡긴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최첨단기술기업들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해당 기업의 전문기술을 바닥부터 이해하는 엔지니어 출신의 최고경영자(CEO)가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었던 빌 게이츠, 애플의 전설적인 CEO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최근 인공지능(AI)과 함께 급부상한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 구글의 에릭 슈미츠 회장,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나아가 메타(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이들 모두가 엔지니어 혹은 개발자 출신의 최첨단기술기업 대표들이다.

위의 사례가 미국에 한정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현재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기업 TSMC의 모리스 창 초대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박사, 2대 류더인 회장은 미국 UC버클리대 전기공학 박사, 3대 웨이저자 회장은 미국 예일대 전기공학 박사 출신이다. TSMC의 성공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학 박사 출신의 최고 경영진의 영향은 분명하다. 반도체기업 CEO가 반도체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다른 반도체 기업과의 협업뿐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도 엄청난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위기와 함께 화제가 된 동아일보 기사(20년 반도체맨이 말하는 삼성전자 위기론)에서 바로 엔지니어 출신 CEO가 없는 삼성전자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보고서를 쓰느라 현장 엔지니어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기업과 엔지니어 출신의 매니저와 경영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기업의 차이는 결국 효율성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 이재용 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전 세계에서 유일한 역사학과 출신 첨단기술기업의 리더다. 삼성전자의 사업지원TF장이자 실세로 불리는 정현호 부회장은 경영학과 출신이다. 물론 삼성도 변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최고경영자를 제외한 중간급 리더십에 수많은 엔지니어가 포진하고 있다고 강변할 수도 있고,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도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불행한 가정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듯, 망하는 기업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술기업의 리더십이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만이 삼성전자가 위기를 겪는 이유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때 “외계인을 잡아다가 고문해 반도체 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뜬소문까지 돌았던 인텔의 몰락이 주는 경고는 분명하다. 인텔의 몰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재무통 출신의 CEO들이 인텔을 장악하면서, 인텔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혁신의 반대편을 선택하며 서서히 무너져왔다. 비슷한 일이 미국의 보잉사와 GE 등의 기술기업에서 이미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쯤 되면 톨스토이의 말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고, 불행한 가정 역시 같은 이유로 불행하다.”

성공하는 기술기업의 리더십 중심엔 엔지니어가 있고, 실패하는 기술기업의 리더십은 반드시 엔지니어를 소외시킨다.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상식으로 산다

첨단기술기업의 본질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의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개발하는 능력에 있다. 최근 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인터뷰에서 “기업이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품 개발과 기술 혁신이 밀접하게 결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기술 리더십에 충분한 가치를 두지 않은 많은 기술 회사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기업들이 다른 분야에서 뛰어날지라도, 리더십 팀의 상당 부분이 강력한 기술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한 자신을 기술 회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저커버그의 기준에서 삼성전자는 기술기업이 아니다.

거의 매일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미국 AI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이 기업들이 최고의 AI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규모와 그 당연한 문화다. 현재 AI를 이끄는 기업 오픈AI는 삼성 같은 제조회사가 아니라 일종의 연구소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올해 노벨상을 받은 알파폴드와 알파고의 창시자 데미스 허사비스 역시 구글이 인수한 연구집단 딥마인드를 통해 생명과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 첨단기업의 교훈을 잘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당연함이 왜 한국에선 실현되지 못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도대체 왜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삼성전자의 CEO를 동양사학과 출신이 맡아야 하는지, 도대체 왜 삼성전자는 오픈AI나 딥마인드 같은 외부에 잘 알려진 연구조직이 아니라 미래전략실 같은 비밀단체로만 알려져야 하는지, 한국의 언론과 정치인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LG화학에서 연구원으로 시작해 39년간 연구원으로 지내다 기술경영자가 된 유진녕 전 LG화학 기술연구원장은 저서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기술기업의 좋은 경영이란 결국 “상식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기업 연구원의 실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직이 실패를 용인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제도적으로도 실패 이후를 보장받을 때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하게 된다. 선도형 제품은 이 순간에 개발된다. 실패에 대한 용인의 크기가 훗날 맞이할 성공의 크기를 좌우한다.” 한국의 기술기업엔 상식이 없다. 현장을 모르는 리더는 기업을 경영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변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돼야 한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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