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퉁소소리>·<햄릿>,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 등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이나 재난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도는 이들을 흔히 난민(難民·refugee), 이로 인해 타지에 정착하는 경우 ‘이주 난민’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중 정치적인 견해나 태도를 고수하며 중립에 있는 이들은 ‘경계인(境界人·liminality)’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고 북한 파병 문제가 국제적으로 대두되면서 일상을 돌아보고 반전운동을 각성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상연되고 있다.
창작 초연 연극 <퉁소소리>(고선웅 각색·연출, 김대한 무대, 장태평 음악, 김시화 안무)는 임진왜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30여 년간 동북아시아를 떠돌다 해후하는 대서사시다. 개막을 앞두고 있어 연습실에 찾아가 보니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가 종횡무진이다. 한·중·일 언어는 기본이고 베트남어까지 대사로, 각국 전통 음률로 쏟아진다. 한국 공연인데 외국어 대사와 외국 전통 음악이 쏠쏠하다. 전쟁통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타국으로 흘러 들어가 겪는 사연들이라 언어와 무관하게 모두 이해된다.
원작은 조선 중기 문신 조위한의 소설 <최척전>(1621)이다. 1막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명나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최척(박영민 분) 이야기가 중심이다. 옥영(정새별 분) 역시 남장을 한 채 남편을 찾아 헤매다 아이와 부모도 잃고 일본으로 떠밀려 간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연명하던 최척과 옥영은 상단을 따라 안남(베트남)까지 흘러갔다가 기적처럼 해후한다. 사연 마디마디를 구수하게 풀어내는 극 중 화자, 노인 최척(이호재 분)의 추임새가 한국적 풍취를 더한다.
한·중·일 언어에 능통한 이주 난민들
디아스포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외국어 실력이다. 최척과 옥영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타국 문화에 대한 해박함으로 전쟁통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찾아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연극 <최후의 분대장: 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장호 무대, 한재권 음악)은 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김학철(1916~2001)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강제로 삭제됐던 ‘조선의용군’의 미시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1940년 전후부터 해방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조선의용군은 한·중·일 3개 국어에 능통한 청년 엘리트들이다. 중·일 전쟁기 자주독립을 목표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로서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던 조선의용군은 마지막 전투인 중국 태항산 호가장 전선에서 대부분 전사한다. 다리 하나를 잃고 끝까지 생존한 김학철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 밀정의 관여까지 그대로 문학작품에 남긴다. 대표적인 기록문학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10대의 김학철(김시유 분)과 20대 이후의 김학철(김세환 분), 노년의 김학철(남명렬 분) 등 나이대별 3명의 김학철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잊힌 역사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11명의 출연진이 한 번의 암전도 없이 180여 분간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닌다. 독립군가를 합창하는 최후의 결전 장면에서는 천장에서 내려온 여러 개의 작은 스크린에 기록영상과 가사가 영사돼 관객들도 손뼉을 치며 제창하게 된다. 잊힌 그들을 기억하고 전쟁의 냉혹함을 되새기게 하는 체험 장치들이다.
위정자 각성에 좌우되는 민초의 삶
디아스포라의 초국적 연대는 문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서도 다양하게 다뤄진다. 연극 <햄릿>(신유청 연출·강태경 번역·황정은 각색·이태섭 무대)은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권력의 정점에서 동생에게 독살당한 선황의 사연을 알게 된 덴마크 왕자 햄릿의 각성을 다루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아버지를 독살한 숙부와 결혼한 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광기와 우유부단함이 교차하는 햄릿이다. 신유청이 연출하고 조승우가 연기하는 햄릿은 국제정세 속에서 부도덕한 위정자 클로디어스(박성근 분)가 자멸한 후 벌어질 연쇄 비극에 대해 냉철히 대비하는 모습을 다룬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이성적인 광기’의 <햄릿>이라고 할 수 있다. 2막 마지막, 모두의 죽음을 맞이한 후 자신도 죽어가는 순간 후회하는 햄릿(조승우 분)에게 친우 호레이쇼(김영민 분)는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고 계십니다”라고 응원한다. 햄릿의 죽음과 함께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는 무대 위 기둥 중 하나는 완전히 스러지고, 연이어 햄릿의 유언에 따라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송서유 분)가 등장해 수습에 나선다. 전쟁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생을 추스를 것으로 상상되는 정황이다.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이사벨 아옌데 원작·크리스티안 더램 연출·홍승희 공동연출)은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인 캘리포니아를 폭정으로 난도질한 친형 라몬(김승대·최세용 분)에 대항하는 동생 디에고(최민우·MJ·민규 분)의 이야기다. 권력욕이 없어 집시들과 어울리며 유유자적하던 디에고는 마스크를 쓰고 조로로 분해 폭군을 물리치고 민생을 되살린다. 전쟁과 폭력을 막으려면 강력하고 선한 위정자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동화다. 액션과 플라멩코 군무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출연진이 모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군무·액션을 소화한다. 폭정에 시달리는 민초의 억울한 삶은 디에고의 친우들인 집시 무리가 이주해 오면서 흥과 저항으로 대체된다. 악기를 들고 군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그간 상연된, 배우들이 연주자를 겸하는 액터뮤지션 작품들과도 차별화되는 본격 기예의 현장이다. 공연이 임박해 객석에 들어서면 출연진들이 관객과 소통하며 객석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위정자들의 희생양인 민초가 풀뿌리 운동으로 살아남는 비법은 초국적 연대 속에서 목소리 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징 같기도 하다.
<햄릿>의 극중극 장면에서 햄릿은 “배우란 각 시대를 보여주는 연대기와 같다”고 강조한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유언했다. <퉁소소리>에서 옥영은 “하늘은 언제나 무심했지만 살아날 바늘구멍도 만들어 주었단다”라며 분연히 일어나 항해 준비를 하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고선웅 연출은 라이브 국악 연주와 동아시아 각국의 민초가 국가를 초월해 서로 돕고 응원하는 초국가적 연대의 군무를 장면화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만 않으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가족애와 인류애에 대한 작품들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상연이 끝났다. <햄릿>과 <조로: 액터뮤지션>은 11월 17일까지, <퉁소소리>는 11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