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음에 존엄한 장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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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2024년 10월 28일(월) ○○○ 님, △△△ 님의 장례가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결식에 참여 부탁드립니다. (중략) ○○○(남) 님은 1961년생으로 2024년 9월 13일 사망하셨습니다. 마지막 주소지는 서울시 중구입니다. ○○○ 님의 유골은 화장 후 분골하여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될 예정입니다. △△△(남) 님은 1988년생으로 2024년 9월 10일 사망하셨습니다. 마지막 주소지는 서울시 동작구입니다. △△△ 님의 유골은 화장 후 분골하여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될 예정입니다.”

무연고 사망자와 저소득층의 장례를 지원하는 단체 ‘나눔과나눔’의 홈페이지에 공지된 장례 일정 중 일부입니다. 올해 10월 일정을 보니 단 하루도 비는 날 없이 장례 일정이 있습니다. 다른 달도 일정이 빡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명절 등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적게는 2건에서 많게는 4건의 장례를 치릅니다. 망자 이름에 외국인이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모두 죽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100개의 탄생이 있다면 100개의 죽음이 따릅니다. 모든 삶이 순탄하지는 않듯이 죽음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당연히 여길 장례를, 어떤 이는 기대할 수조차 없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무연고 사망자’는 5415명이라고 합니다. 2020년(3136명)보다 72.7% 늘었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추세를 보면 무연고 사망자 역시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왜 그들의 장례를 굳이 치러줘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시신을 ‘처리’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장례와 애도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의식입니다. 무연고자라고 해도 사회와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법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망자를 보내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 내가 죽은 뒤 누군가 나의 장례를 치르고 애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살아가는데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만큼 죽음도 존엄해야 합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 표지 이야기는 ‘무연고자 공영장례 현장에서 바라본 한국사회’입니다. 한해 무연고 사망자 5000명이라는 통계는 현재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입니다. 피할 수 없는 ‘대세’의 일부이기도 하고, 연대가 끊어지고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한국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장례 현장도 다녀왔습니다. 또 무연고 사망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법적 결혼과 혈연을 넘어선 장례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도 알아봤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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