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라지는 가을, 흔들리는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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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추석 후 쏟아진 폭우로 낙동강 하구 다대포 백사장에 흙탕물과 함께 수풀과 나뭇가지가 떠밀려왔다. 정봉석 대표 제공

지난 9월, 추석 후 쏟아진 폭우로 낙동강 하구 다대포 백사장에 흙탕물과 함께 수풀과 나뭇가지가 떠밀려왔다. 정봉석 대표 제공

내가 어릴 적 추석 아침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가을 아침의 싸늘한 공기와 더불어 설레는 기운이 함께 감돌았다. 집안 곳곳에선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은 차례 음식을 같이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허물없이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됐다. 온 가족이 함께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부모님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내 삶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빌었다.

20년 넘은 해외 생활에서 추석은 낯선 문화, 그저 지나가는 또 다른 하루였다. 출근길의 바쁜 도시와 번화한 거리는 한국처럼 명절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가끔 주위 한인, 중국인들에게 “오늘이 추석, 중추절”이라고 이야기하며 미소를 짓는 정도다. 그 짧은 순간, 마음속 따뜻함이 느껴지지만,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추석날 저녁에는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먼 타국에서도 달은 여전히 둥글게 떠 있고, 그 빛은 어릴 적 한국에서 보았던 달과 다르지 않았다. 그 달빛을 바라보며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짧은 순간이나마 추석날 밤 달빛은 고향과 나를 이어주었다. 먼 타향에서도 추석은 그저 지나갈 수 없는 그리운 날이었다.

추석 연휴, 극한 폭염과 폭우

한국에 돌아와 경험한 추석은 과거의 기억과 좀 다르다. 중추절이라고도 불리는 추석은 가을의 중간이 아니었던가? 올해 여름 내내 이어진 폭염이 추석 연휴까지 덮쳐 성묘하는데 땀을 뻘뻘 흘렸다. 연휴 내내 전국 곳곳에서는 9월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했다. 추석 당일(9월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광주광역시 35.7도, 전남 광양 35.4도, 순천 33.6도까지 올라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9월 기온으로 기록됐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역대 가장 늦은 폭염경보가 발효됐다. 참고로 폭염경보(주의보)는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5도(33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할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된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까지 폭염주의보도 아닌 폭염경보였다. 서울에 ‘9월 폭염경보’가 내려진 것은 지난 9월 10일이 사상 처음이었고, 추석 당일이 두 번째다. 비교적 시원한 남쪽 부산에도 폭염경보가 발령됐고, 열대야가 지속했다. 역대급 9월 폭염에 내가 사는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은 더위를 피해 찾은 늦깎이 ‘피서객’으로 성황을 이뤘다. 해변 주위로 캠핑 의자, 돗자리를 깔고 더위를 쫓는 가족 단위 피서객이 진을 쳤다.

추석 때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번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경남 지역에는 지난 9월 20∼21일 이틀간 평균 278.6㎜의 많은 비가 내리며 땅 꺼짐, 산사태, 낙석, 침수, 정전사고가 잇따랐다. 창원은 이 기간 529.1㎜에 달하는 강수량을 기록했다. 이 정도 양의 비는 200년에 한 번 내리는 정도였다. 인근 김해도 426.8㎜의 많은 비가 내리며 큰 피해를 남겼다. 쏟아진 비는 인근 낙동강으로 모였다. 때아닌 9월 피서객이 떠난 다대포 해수욕장은 폭우와 함께 떠밀려온 수풀과 나뭇가지, 흙탕물이 뒤섞인 채 낙동강 하구로 몰리면서 또다시 홍역을 앓았다.

추석 연휴 기간 극한기후로 몸살을 앓은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태풍 버빙카가 상하이를 강타했다. 버빙카는 최근 70여 년간 상하이를 강타한 태풍 중 가장 강력했고, 1등급 허리케인에 해당할 강풍이 불었다. 중국 당국은 운전자 안전을 위해 인구 2500만명인 상하이 전역의 교통망을 폐쇄했다.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등에서는 폭풍 보리스가 폭우를 퍼부으며 광범위한 홍수를 일으켰다. 중부 유럽에 큰 피해를 주며 최소 20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9월 16일 밤 대서양 연안 주민들을 놀라게 한 역사적인 폭풍우가 발생했다.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 기록적인 강우량과 시속 60마일(약 96.56㎞)의 열대성 강풍이 발생했는데, 미국 국립기상청(NWS)의 측정 결과 12시간 동안 강우량은 최대 18인치(약 457.2㎜)였고, 이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록이었다. 이어서 지난 9월 말 허리케인 헬린이 미국 동남부를 휩쓸며 200명 넘는 사망자를 냈다. 여러 주에 정전 피해를 내고 도로와 인터넷이 끊겼다. 테네시주에서는 홍수로 인한 댐 붕괴 위험 때문에 근처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는 피해 상황에 관해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개 주가 요청한 비상사태 선포를 승인했다.

바뀌는 사계절 길이

최근 한국 기상청은 여름이 길어진 현실을 반영해 한반도의 ‘계절별 구간’을 조절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계절은 봄(3~5월), 여름(6~8월), 가을(9~11월), 겨울(12월~2월) 등 3개월 단위로 구분됐다. 기상학적으로 여름 시작은 일 평균기온 9일간, 이동 평균한 값이 20도 이상으로 올라간 뒤 다시 떨어지지 않는 때로 본다. 같은 방식으로 봄은 일 평균기온 5도 이상일 때이고, 가을은 20도 미만, 겨울은 5도 미만이 기준이다. 기상청이 과거(1912~1940년)와 최근 10년(2011~2020년)의 여름 일수를 비교해 보니 과거 여름 평균 일수는 98일이었는데 최근에는 127일로 늘었다. 이런 변화를 고려해 기존 계절별 구분을 현실적으로 맞추려는 것이다. 계절 구분 변화는 우리나라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 117년 만에 처음이다. 현재로서는 여름을 1개월가량 늘리고 가을은 1주, 겨울은 최소 2~3주 줄이는 방안 등으로 논의 중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극한기후, 맞지 않는 24절기와 사계절, 해수면 상승 그리고 생태계의 변화는 인류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킨다. 한국의 전통적 수산물인 명태는 자취를 감췄다. 강원도 고성은 수입된 러시아 명태로 “명태 없는 명태 축제”를 이어간다. 아내가 며칠 전 만든 김밥에는 시금치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시금치 한 단이 1만원에 가까워 감히 살 수 없었다고 했다. 시금치가 없어도 김밥이 맛있다고 한 것은 나의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일상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과 전통, 기억은 점점 더 사라진다. 오늘 느끼는 가을바람의 선선함이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까? 이 가을바람이 내 기억에만 갇혀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정봉석 JBS 수환경 R&C 대표·부산대학교 환경공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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