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홍련>·<베르사유의 장미>,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트랩>
보고 싶은 공연과 봐야 할 공연을 수없이 접하다 보면 가끔 폐부 깊이 박히는 작품을 만나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작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겹쳐 심중을 살피는 순간이다. 뮤지컬 <홍련>과 <베르사유의 장미>,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와 <트랩>의 주인공은 관객을 향해 치부까지 다 드러내며 캐릭터를 깊게 들여다보게 이끈다. 상대가 전하는 말과 행동에 집중해 저변에 있는 감정과 고통에 동기화되는 순간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로, 캐릭터의 고충은 나의 고충으로 화장된다. ‘경청(傾聽)’이 선사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경청을 통한 집단 치유
창작 초연 뮤지컬 <홍련>(배시현 작·작사, 이준우 연출, 박신애 작곡, 남경식 무대, 김진 안무)은 망자를 심판하는 바리(이아름솔·김경민·이지연 분)와 원귀로 떠돌기 직전, 소멸과 환생의 기로에 선 홍련(한재아·김이후·홍나현 분)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전통 신화와 전래동화 주인공인 ‘바리공주’의 바리데기(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와 ‘장화홍련전’의 홍련은 ‘천도정’이라는 신화적 공간을 매개로 속내를 털어놓는다.
증오와 공포에 찌들어 스스로 존속 살해범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홍련은 바리와 저승 차사들, 관객의 경청과 공감으로 천도되기에 이른다. 원한을 승화해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일련의 과정은 록밴드와 거문고 등이 섞인 탈경계 밴드의 연주로 표현된다. 홍련과 바리의 극고음 이중창은 심혈에 찌든 원망과 분노를 토해내게 한다. 속이 후련해지는 집단 치유의 장이다.
반면 한국 초연 라이선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아담 랩 극작, 박천휴 번역·윤색·연출, 박상봉 무대)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넓고 쾌적한 거실이자 서재로 디자인된 무대는 극 내향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심연을 깊이감 있는 문학적 토론을 통해 드러내게 만든다. 미국 예일대 영문과 교수 벨라(문소리·서재희 분)와 영문과 학생 크리스토퍼(이현우·강승호·이석준 분)가 보여주는 결은 같지만 세대는 다른 예술적 고민과 예민함이 2시간 가까이 무대를 채운다. 단순한 티키타카(주고받기)가 아닌, 심연을 토해내는 그들만의 이야기는 오가는 대화의 반 이상 차지하는 문학작품에 관해 거의 모르는 관객들마저 빨려들게 한다.
벨라와 크리스토퍼만의 세상에 관객들이 기꺼이 주파수를 맞춰 동참하는 이유는 방백과는 다른 결의 ‘관객을 향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이 깊은 속살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순간 관객들의 속내도 교집합이 된다. 크리스토퍼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인 소설 첫 장에 쓰인 도스토옙스키의 말 “우리는 완벽하게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한눈에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와 같은 기적 같은 순간이다.
창작 초연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이케다 리요코 원작, 왕용범 극작·작사·연출, 이성준 작곡, 서숙진 무대)는 ‘마음이 가는 사람’인 앙드레의 희생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행동으로 옮긴 오스칼 이야기다. 가상인물 오스칼(옥주현·김지우·정유지 분)과 앙드레(이해준·김성식·고은성 분)를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이 뒤섞여 나오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왕당파와 혁명파의 부조리가 전시된다. 1972년 발표된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 원작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임에도 지금까지는 일본 내수 중심인 다카라즈카 극단(여성 국극단) 공연이 유일했는데 한국 창작 뮤지컬로 번안되면서 보편적인 청년 세대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전면화한 작품이 됐다. 방대한 원작을 잘 벼려내 오스칼과 앙드레 중심으로 혼돈의 사회상에 대한 계급 불문, 모든 청년의 공감과 연대를 다루었다. 인형 같은 황실 근위대장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남장 여성으로 살아가는 귀족의 딸 오스칼은 평생 자신에 맞춰 큰 사랑을 실천한 앙드레를 잃는 순간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는 내면의 소리를 인정하고 시민혁명의 선두에 선다.
내면의 소리 나누는 기적
이는 국내 초연 연극 <트랩>(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원작, 변우정 각색, 하수민 재각색·연출, 남경식 무대)이 넌지시 찌르는 의표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개인화된 세상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세상인가?’ 질문한다.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가다 사고를 당해 숙박할 곳을 찾은 트랩스(김명기 분)는 얼결에 노년 법조인들이 놀이로 하는 모의재판에 피고로 참여한다. 아름다운 만찬과 음악, 미슐랭 별 3개 식당도 울고 갈 고급스러운 음식과 와인의 향연 속에서 트랩스는 자신도 모르게 유도 신문에 빠져든다.
트랩스의 입에서 상사 부인과의 불륜, 상사의 죽음을 기대했던 속내가 흘러나오고 판사 역 집주인(남명렬 분)과 검사 역 초른(강신구 분), 변호사 역 쿰머(김신기 분), 사형집행인 역 필렛(손성호 분) 등을 통해 논거와 판결문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트랩스는 내면 깊은 곳 양심과 윤리의 자기 정화에 매몰된다. 가정부이자 집사로 모든 파티의 수발을 들고 라이브 연주를 통해 극적 전개를 이끄는 시모네(이승우 분)의 보이지 않는 승부수 덕일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소재, 다른 미장센의 작품이지만 네 작품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과정과 결과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들의 결말은 모두 죽음을 매개로 한 성찰이기도 하다.
<홍련>은 긴 무명천을 횡단하며 이승의 원한과 분노를 승화한 망자를 인도하는 씻김굿을 소극장 무대에서 처음으로 깊이감 있게 재현한다. <사운드 인사이드>는 무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미국 도시 뉴헤이븐의 눈이 내리는 넓은 공원을 무대예술로 재현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성에 매몰된 주인공의 현재와 미래를 애도하게 만든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국내 처음 시도되는 레이저 다중 고정장치를 활용해 오스칼과 근위대가 수천만 민중의 선봉에 선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트랩>은 내면의 소리에 답한 트랩스의 충격적인 결론을 통해 다른 극 중 인물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경청하는 자세는 타인을 감각하고 나를 존중하겠다는 선언이다. <홍련>은 마지막 넘버 ‘사랑하라’에서 “부디 너를 사랑하여 부디 너를 용서하라”고 외친다. <베르사유의 장미> 역시 마지막 넘버 ‘나를 감싼 바람은 내게만 불었나’에서 “마음을 억누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다시 태어날 기회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다 함께 가자”고 말한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 역시 죽음을 향해 가는 미래의 기억이다. 이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며 스스로 ‘힐러’(healer·게임용어로 팀원을 치유하는 역할)가 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10월 13일, <홍련>과 <트랩>은 10월 20일, <사운드 인사이드>는 10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