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사북-아직도 국가의 사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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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사북사건에 대해 국가에 “당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당시 광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노조위원장 부인 김순이씨를 위로할 수 있는 조처를 하라”고 권고했다. 권고는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았다.

/영화사느티

/영화사느티

제목: 1980 사북

제작연도: 2024년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24분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박봉남

출연: 이원갑, 황인욱

상영: 2024년 9월 28일(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등급: 미정

호기심은 때로 잔인하다.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영화사에서 받은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의 온라인 시사용 영상을 보던 중이었다. 영화에 등장한 이원갑씨가 김순이씨에게 쓴 편지 내용을 읽기 위해서였다. 1980년, 계엄군 합동수사본부는 이씨를 사북사건의 ‘총책’으로 지목했다. 1980년 계엄사의 검열을 받은 언론은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서야 대문짝만하게 1면 머리기사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3500명의 광부가 난동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1980년 4월, 사북에서 벌어진 ‘사건’

1980년 사북사건을 상징하는 사진이 있다. 사북 동원탄좌를 점거한 광산노동자들이 노조 지부장 이재기씨의 아내 김순이씨를 입구 게시판 기둥에 결박해 놓은 모습이다. 1980년 4월 21일, 사북 광부들의 ‘폭동’은 표면적으로는 광산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고 사측과 결탁한 것으로 보이는 ‘어용 노조 지부장’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은 노조에 항의하러 모인 노동자들의 집회를 불허했다. 현장 감시를 위해 나와 있던 경찰이 노동자들과 충돌했고, 분노한 노동자들을 피해 지프를 몰고 도주하다가 막아 나선 노동자를 치었다. “경찰이 광부를 차로 치어 죽였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재기 노조 지부장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분노한 군중은 지부장 대신 지부장의 부인을 잡아 묶어놓고 가혹행위를 했다. 당시 정권 찬탈을 노리던 정치군인들에겐 ‘호재’였다. 한국전쟁 때 인민재판을 연상시키는 김순이씨 린치 사진은 광부들의 봉기를 ‘사회 혼란을 틈타 적화통일을 노리는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몰아가기 딱 좋았다.

소요는 3~4일 만에 수습됐다. 진짜 공포는 5월에 닥쳤다. 계엄군은 수습대책회의를 연다고 노동자들을 집결시킨 후 덮쳤다. 이후 매일 밤, 한명 한명씩 연행됐다. 사건에 대한 보복은 없을 것이라는 강원도경 국장의 약속은 휴짓조각처럼 버려졌다.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다. 연행된 사람은 주동자나 주모자, 선동자 또는 배후세력 중 한 명이 돼 있었다. 이중 강윤호씨는 돌로 예비군 무기고의 문을 부수려 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영화에서 강씨는 돌로 접근금지라고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상처는 남는다. 강씨가 무기고의 문을 부수려고 했다는 다른 광부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타와 고문으로 만들어낸 허위진술이다(강씨는 2022년 재심에서 최종 무죄선고를 받았고 올해 2월 사망했다).

상처 치유와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상처는 계속되고 있다. 광부들이 김순이씨에게 가한 가혹행위는 사실이다. 8년 전쯤 언론 인터뷰에서 김씨는 린치 현장에 사건의 총책으로 지목된 이원갑씨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정작 가혹행위가 벌어질 당시 이씨는 삼척탄좌 객실에 감금돼 있었다고 말한다. 영화에 내레이터로 참여한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의 호소가 의미심장하다. “진짜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하는 동원탄좌와 국가는 뒤로 빠지고 우리는 계속 이재기만 공격할 건가요.” 영화 끝에 결국 이원갑씨가 고집을 꺾고 김순이씨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편지를 자필로 쓰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엔 두 사람이 울컥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명은 당시 영월에서 차출돼 사북에 갔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경찰이다. 이제 노인이 된 그는 다쳐 쓰러진 자신을 끌어안고 병원에 보냈던 사람은 광부였다고 울먹이며 말한다. 또 한 명은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 이재기씨와 김순이씨의 아들들은 지금도 이원갑씨나 황인오씨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사북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쓴 황 회장의 조사보고서엔 아버지인 이재기씨의 ‘전횡’을 사태의 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했던 이재기씨 아들들에게 황 회장은 영화를 통해 울먹이며 사과한다. 아직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국가에 “사북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당시 광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노조위원장 부인 김순이씨를 위로할 수 있는 조처를 하라”고 권고했다. 권고는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았다. 영화는 “사북사건 피해자들은 국가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김순이씨를 결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하두만·영화사느티

/하두만·영화사느티

사북사건을 상징하는 김순이씨 결박 사진은 당시 하두만 신아일보 기자가 찍었다. 여러 언론사가 1면 머리기사로 사북사태를 전하면서 그 사진을 썼다. 사진기자협회가 만든 <1980년 보도사진연감>에도 이 사진이 실렸다. 연감엔 김순이씨 사진과 함께 탄광 노동자들에 밀려 쫓겨나는 경찰들 사진도 두 장 실려 있다.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혐의를 둔 사람은 남성 2명과 여성 3명이었다. 그중 여성 2명은 “노조 지부장 부인이 누군지도 몰랐다”라고 영화에서 밝혔다. 구타와 고문으로 짜 맞춘 엉터리 수사였다는 의미다. 영화에 나온 이원갑씨가 김씨에게 보내는 자필 편지를 화면을 정지해놓고 자세히 읽었다. 편지 전문은 아니고 첫 장만 스치듯 나와 있다. 이원갑씨는 첫 장에서는 자신의 기존 주장을 반복한다. 사건이 일어난 1980년 4월 22일 “오전 8시경에 경찰에 의해 삼척탄좌 객실에 감금돼 있었고, 오후 4시경 강원도경 국장과 전국 광업 노조위원장이 와서 ‘지부장 부인이 광부들에게 잡혀 있으니 가서 풀어주고 협상안을 가져와라’라고 해서 광업소에 와서 광부들을 무마시키고, 기둥에 묶인 김순이씨의 결박을 풀어주고 통제선까지 인도했다”라고 적었다. 이씨의 주장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몇 해 전쯤 사북민주항쟁동지회 회장을 맡은 황인오씨와 소셜미디어(SNS)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진을 두고 ‘김순이씨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명확한 답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사북사태의 주범으로 몰린 사람들이 받은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할 질문은 아니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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