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위기의 응급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의료공백 7개월에 응급의료 역량 한계…정부 대책도 역부족

추석 앞두고 초비상…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처방 필요성 대두

지난 9월 3일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에 구급차가 환자 이송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의·정 갈등 이전 전공의까지 25명이 근무하던 이 병원 응급실에는 전문의 8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병원은 매주 수요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 30분까지 성인 진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조태형 기자

지난 9월 3일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에 구급차가 환자 이송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의·정 갈등 이전 전공의까지 25명이 근무하던 이 병원 응급실에는 전문의 8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병원은 매주 수요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 30분까지 성인 진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조태형 기자

지난 8월 4일 오후 8시 40분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에서 2세 여아가 열을 동반한 경련 증상을 보였다. 신고를 받고 소방 구급대원이 나섰지만, 곧장 출발하지 못했다. 진료할 수 있는 응급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듭된 전화 문의 끝에 신고 후 1시간이 지난 뒤에야 12번째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아이는 한 달째 의식불명 상태라고 한다. 지난 9월 1일에는 서울 강남구에 사는 40대 여성이 ‘안약과 착각해 눈에 순간접착제를 넣었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신고가 소방에 접수됐다. 출동한 구급대원이 20곳이 넘는 병원에 전화를 돌렸지만, 진료가 가능한 병원은 찾지 못했다.

환자에게는 촌각을 다투는 일이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을 때는 응급실 문턱도 밟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원생 A씨는 지난 8월 경북 지역에서 산길을 걷다가 넘어져 손목이 부러졌다. 오후 늦은 시간 인근의 병원에서 간단한 처치를 받았는데 큰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A씨가 서울로 돌아와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은 시각은 오후 10시 무렵. 고통을 줄이고 현재 부상 부위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정확히 알고 싶었지만, 응급실 진료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응급실이 있는 수도권의 병원 몇 곳에 전화로 진료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긍정적으로 답변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의료공백 7개월, 응급의료 역량은 한계에 달했다. 그러나 현 상황에 대한 정부의 진단은 현장과 온도 차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29일 “의료현장을 가보시라. 여러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윤 대통령은 지난 9월 4일 심야에 경기도의 권역응급의료센터를 방문해 “응급의료가 필수의료 중 가장 핵심인데 국가에서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도와드리지 못한 것 같아 참 안타깝다”고 했다.

진단이 정확해야 해법도 찾을 수 있다. 정부는 응급실 과부하에 응급실 전문의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군의관 및 공보의 등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대책으로 내놨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상황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라는 싸늘한 평가가 나온다. 당장은 ‘백약이 무효하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 반복되는 응급실 위기를 막기 위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네가 나가면 내가 죽는다

가장 심각한 위기에 노출된 것은 평소에도 취약했던 지방 의료다. 지역의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A씨는 “계속 주말 없이 일하고 있다. 원래도 지역에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던 거점병원은 상황이 더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의료진이 부족하니까 중증 환자 위주로 볼 수밖에 없다. 소방에서 환자를 보내도 되냐고 연락이 와도 경증일 가능성이 있으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응급실이 한계에 봉착한 첫째 원인은 일손 부족이다. 전국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하는 의사 수는 지난해 4분기 2600여명에서 지난 8월 기준 1700여명으로 줄었다. 전문의는 소폭 늘었지만 일반의, 인턴, 레지던트가 700명 넘게 줄었다. 남아 있는 의료진은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태가 길어지면서 체력이 소진된 전문의들의 사직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 15명의 의사가 근무하던 세종충남대병원 응급실은 최근까지 8명이 사직하면서 지난 9월 1일부터 성인에 대한 야간진료를 중단했다. 건국대충주병원도 최근 응급의학과 전문의 7명이 전원 사직서를 냈다. 잔류를 설득해 2명이 계속 근무하기로 했지만, 야간과 주말에는 응급실 운영을 중단하기로 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4일 전체 응급실 409곳 중 운영을 부분 중단한 응급실이 5곳이라고 밝혔다.

언제 어디에서 추가로 운영을 중단하는 병원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지역의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B씨는 “전보다(전공의 이탈이 시작된 지난 2월 이전) 업무강도는 2~3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 상태가 7개월까지 이어지다 보니까 우리 병원에도 사표를 쓰고 쉬고 싶다는 의사가 많다. ‘네가 나가면 내가 죽는다’고 겨우 설득해서 잡아두고 있는 상태다. 상황이 이러니 분원 응급실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야간 근무를 축소하고 있다”고 했다.

배후진료가 어려운 진료과가 늘고 있다는 점도 응급실 위기의 원인이다. 응급실은 응급처치를 마친 환자를 중환자실 등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진료과에 연계하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전공의 이탈 사태가 길어지면서 배후진료과도 과부하에 걸려 입원환자와 외래진료를 줄이는 추세다. 배후진료과가 원활히 운영되지 않으면 응급실에 여력이 있더라도 중증응급질환자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실제 보건복지부 집계에 따르면 180개 응급의료센터 중 심근경색·뇌출혈 등 27개 증증응급질환의 배후진료가 가능한 기관은 종전 109곳에서 지난 9월 2일 기준 102곳으로 줄었다. 세부적으로는 대동맥 수술이 가능한 기관이 72곳에서 69곳, 영유아 장중첩 및 폐색 수술이 가능한 기관이 93곳에서 83곳, 응급 분만이 96곳에서 91곳으로 줄었다.

정부 대책에도 현장 싸늘

조석주 부산대학교 응급의학과 교수가 제안하는 응급의료체계.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구축해 환자와 119, 의료기관을 연결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골자다.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환자는 1차적인 중증도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소방의 구급상황관리센터는 환자 이송이 가능한 병원을 안내 받을 수 있다. 환자를 수용할 여력이 없는 의료기관은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전원이 가능한 의료기관을 안내 받을 수 있다. 조석주 교수 제공

조석주 부산대학교 응급의학과 교수가 제안하는 응급의료체계.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구축해 환자와 119, 의료기관을 연결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골자다.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환자는 1차적인 중증도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소방의 구급상황관리센터는 환자 이송이 가능한 병원을 안내 받을 수 있다. 환자를 수용할 여력이 없는 의료기관은 광역 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전원이 가능한 의료기관을 안내 받을 수 있다. 조석주 교수 제공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3차례에 걸쳐 응급의료대책을 내놨다. 의사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250% 가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료진 이탈에 일부 병원들이 연봉 4억원을 내걸고도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의관 등 대체인력 배치에 대해서도 현장 반응은 회의적이다. 팀으로 움직이는 의료의 특성상 손발을 맞춰보지도 않았고, 병원의 장비에도 익숙하지 않은 대체인력이 당장 도움이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최악은 정부가 내놓은 응급실 과밀화 해소 방안이다. 응급실 과밀화는 상대적으로 증상이 가벼운 환자들이 응급실을 차지하면서 중증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번 위기 이전에도 소위 ‘응급실 뺑뺑이’를 부르는 주된 원인으로 지적됐다. 이에 정부는 경증 환자가 증가하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경증 환자의 진료비 자부담을 종전의 60%에서 90%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내놨다.

대부분 환자는 앓고 있는 질환의 중증도를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조석주 부산대학교 응급의학과 교수는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만 심근경색 환자가 아니다. 심근경색 환자 중에는 땀을 뻘뻘 흘리거나 가슴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환자가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일률적인 판단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정책 입안자인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박 차관은 지난 9월 4일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본인이 이렇게 전화를 해서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경증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될 것 같다”고 발언해 빈축을 샀다.

경증과 중증을 엄격하게 나누고, 이를 진료비에 연계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진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자부담률 인상이 응급실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을 테니 취약한 이들의 진입 장벽만 높아질 수 있다.

응급실 과밀화 해소를 위한 장기 대책을 이번 기회에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의 중증도를 1차로 파악해 적절한 병원을 안내하고, 인근의 의료자원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구급 이송이나 병원 간 전원을 지휘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응급의료정보센터 1339가 이런 임무를 수행했지만, 2012년 폐지되면서 각 지역 소방서가 이를 하고 있다. 현장 구급대원의 역량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응급상황 대처에 편차가 발생할 수 있다.

조석주 교수는 “환자 분산을 위해서는 어느 병원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단계가 중요하다. 응급 의료 상황실을 통해 환자가 중증도에 대한 전문가의 1차 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프로토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