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신자유주의’라는 말의 범람 속에서 살았다. 생전 처음 듣는 개념에 대해 공부하면서, 무언지도 모를 그것에 맞서 싸웠다. 우리는 모든 나쁜 변화들을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설명하곤 했다. 대통령과 정부 기술관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화하고 있고, 이라크 전쟁은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의 첨병이었으며, 대학과 지역사회는 모조리 신자유주의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존경했던 우상과 멀어졌고, 좋은 가치라 여기던 것의 환상과 작별했다. 우리는 글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배운 후 상상했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큰일이라도 나겠어? 아니, 어쩌면 세상은 망해버리는 게 아닐까?” “글쎄… 술이나 마시자.”
그 즈음 봤던 홍상수 영화 속 한 인물은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뭔가 모두의 폐부를 찌르는 듯하지만, 20년 쯤 지나고나니 의문이 돌아온다.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라면 대체 뭐가 될 수 있다는 걸까? 인간 사회에서 ‘괴물됨’이란 단순한 공포나 금기의 규범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타자성(otherness)’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 가깝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혐오하면서 붕괴되는 사회로부터 유리된 채 떠도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괴물이 되질 바라지 않지만, 여전히 인간이길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뒷걸음질치기만 했던 건 아닐까? 한때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나 규범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폐기되거나 무시되는 모습을 볼 때, 모두가 모두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볼 때 절망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한국 제도정치가 붕괴하고 시민사회의 취약성이 커지는 걸 목격하면서, 난관을 돌파하려면 내 삶의 양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훨씬 더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실망하기보다 인내하며, 타인과 개방적으로 관계 맺는 새로운 습관이 필요하다고.
신자유주의라는 제도 개혁은 한국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것은 분명 제도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에서 노동하고 관계를 맺으며, 욕망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육화되는 행위 규칙으로 기능하기도 하고, 어떤 판단의 근거나 취향 따위를 결정짓는 완전히 체화된 행위 양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쩌면 신자유주의가 바꾼 우리 삶의 풍경은 일상의 루틴이나 관계를 맺는 방식, 미래에 대한 사고, 타자의 괴물됨에 대한 공포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간 감각에는 역사가 없다. 단지 내일이나 연말 정도의 ‘가까운 미래’가 유령처럼 떠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서로를 믿지 않으며, 함께 만드는 운동이 얼마나 지리멸렬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인지 잊어버렸다. 어떤 행동이 단기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않으면 “그것은 효능감이 없다”고 선언해버리고 기각해버리거나, 미리부터 겁먹고 시도하지 않는다. 전술적인 이견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견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라고 재단해버린다. 토론은 지루한 것이며, 설령 토론하게 되더라도 내 생각을 바꿀 여지는 만들지 않는다.
한국 제도정치가 붕괴되고 시민사회의 취약성이 커지는 걸 목격하면서, 우리가 한동안 요원하고 어려워 보이는 난관을 돌파하려면 내 삶의 양식도 달라져야 하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된다. 훨씬 더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과거에 대해 곱씹어보며, 실망하기보다 인내하고, 타인과 훨씬 더 개방적으로 관계맺을 새로운 습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어쩌면 그런 개방성과 중장기적 안목이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행위 양식에 맞설 수 있는 습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