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그냥 삶 자체로 힘든 이들을 위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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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원작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짧은 이야기의 한계와 아쉬움을 풍성하게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흔한 연애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로 그보다 크고 넓은 삶의 성찰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큰 미덕이다.

/㈜디오시네마

/㈜디오시네마

제목: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Sometimes I Think About Dying)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93분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레이철 램버트

출연: 데이지 리들리, 데이브 메르헤예, 파르베시 치에나, 마르시아 드보니스

개봉: 2024년 9월 4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장편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의 원작은 2019년 스테파니 아벨 호로비츠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12분짜리 단편 영화로 유튜브로 볼 수 있다. 내성적인 여주인공의 독백으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 남자를 향한 호감과 두려움 사이의 혼란스러움을 깔끔하게 그려낸다.

2019년 선댄스 단편영화 경쟁 부문에서 상영되고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영화상 1차 후보에 선정됐다.

리메이크이자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원작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짧은 이야기의 한계와 아쉬움을 풍성하게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프랜(데이지 리들리 분)의 삶은 무난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찌감치 회사로 향하고, 열댓 명 남짓 근무하는 평범한 사무실에서 일한다. 소소한 업무와 대화로 하루가 지나면 느긋하게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와 간편식으로 저녁을 먹고 잠시 퍼즐 책에 집중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어느 날 정년 퇴임한 캐롤(마르시아 드보니스 분)을 대신해 로버트(데이브 메르헤예 분)가 출근한다. 그의 등장으로 이제껏 다른 이들과 분명한 선을 그어 자신의 평온을 지켜왔던 프랜의 마음 한구석에 균열이 시작된다.

통속적 제목을 초월하는 진솔한 인생 예찬

영화는 시작부터 인상적이다. 무대가 된 미국 오리건주 아스토리아 마을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광이 서정적 음악과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로 위를 구르는 상한 과일, 도시너머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형선박, 주택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내려오는 사슴, 비둘기에 둘러싸여 상념에 젖은 노인의 모습,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잎, 뒤이어 바닷가 저 멀리 서 있는 여주인공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프랜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생기가 되살아나는 순간은 문득문득 자신이 죽은 모습을 상상할 때다. 하지만 끔찍하거나 기괴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숲속, 바닷가, 텅 빈 사무실 등 대부분 혼자임을 실감하는 다양한 장소에서 마치 잠든 것처럼 편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가 상상하는 죽음의 이미지란 죽음 자체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그에 맞닿아 있는 삶에 대한 과격한 애정의 역설임이 명확해진다.

마치 흔한 연애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로 그보다 크고 넓은 삶의 성찰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미덕이다.

원제목(Sometimes I Think About Dying)을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때때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이다. 한국어 제목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다소 통속적이고 허세도 느껴지지만, 영화가 품고 있는 양가적 감정을 제대로 반영한 탁월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소소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고귀함

주연을 맡은 데이지 리들리는 1992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출생이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오필리아>(2021)에도 출연했지만, 대부분 관객에겐 일명 <스타워즈> 시퀄 3부작으로 불리는 3편의 작품의 여전사 레이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이 작고 섬세한 작품에 설득력 있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기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리들리는 “세상과 주변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마음에 들었다. 대본에는 많은 아름다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라고 회고하는데, 주연뿐 아니라 제작에까지 참여하여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가 시종일관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냉소주의를 싫어한다는 레이철 램버트 감독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모든 삶에는 미세하지만, 정교한 방향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농담이나 현재의 성가신 문제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먹는 도넛. 그것은 사소하지만, 초월적이며 굉장히 시적인 것들이다. 인간으로서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어리석지만, 그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힘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기쁘고 경사스러운 것이다.”

레이철 램버트는 2023년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떠오르는 여성 감독 28인’에 선정됐다.

제목만으로도 빛나는 영화들

/㈜영화사 조제

/㈜영화사 조제

본편의 진위나 완성도를 떠나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 있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1974)는 작품 속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남녀의 교감만큼이나 시적이고 철학적인 제목으로 관객에게 기억된다. 1990년대 중후반 불붙었던 예술영화 유행으로 한국에서는 23년 만에 개봉해 정식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미지수에 대한 방정식>(Équation à un inconnu)은 제목만큼이나 난해하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프란시스 사벨이 연출한 이 퀴어 로맨스이자 노골적 포르노는 1980년 개봉 직후 바로 잊혔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감독 얀 곤잘레스는 게이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칼+심장>(Un couteau dans le coeur·2018)을 준비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조사하던 중 <미지수에 대한 방정식>을 발견했고, 이는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됐다.

탐정영화의 대가로 대접받는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1986)는 제목처럼 필름 느와르 스타일의 범죄 미스터리에 더해진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Landscape in the Mist·1988)은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 <비키퍼>(1986)와 더불어 일명 ‘침묵 3부작’으로 불린다.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선 어린 남매의 힘겨운 여정은 뚜렷한 여운을 남긴다.

이자벨 코이제트 감독의 캐나다 영화 <나 없는 내 인생>(My Life Without Me·2003),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가 90세에 완성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ous n’avez encore rien vu·2012·사진)도 멋진 제목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작품들이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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