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가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뉴라이트 인사들은 계속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광복절의 의미
광복절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날은 한국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여러 나라가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과 8월 15일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일의 명칭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전쟁 승리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기념일은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는 숫자의 조합이 아니라 후세에 전하는 일종의 메시지다. 5월 8일과 8월 15일은 어떤 메시지를 남기는가? 역사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거의 모두가 합의하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 반파시즘, 즉 파시즘의 존재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이다. 두 기념일이 지시하는 일차적 사실은 ‘우리 연합군이 독일과 일본에 승리했다’는 것이고, 이는 미래세대를 향해 ‘앞으로도 전 세계적 반파시즘 연대가 파시스트에게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를 요구한다.
한국의 광복절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일본에 맞서 계속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는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한국인은 8월 15일마다 일본에 대한 전의를 불태워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메시지일까? 일본의 지배가 끝났다는 일차적 사실을 제외하면, 광복절의 합의된 의미가 있는지 불분명하다. 현세대는 그 기념일을 통해 후세에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해 주려는 것인가? 식민지 조선이 당했던 고통을 잊지 말라는 것인가? 그럼 고통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미래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광복절에 관한 공통의 해석과 개념이 부재한 이유 중 하나는 친일 세력을 온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할 수도 있다. 공통의 해석과 개념이 없으니, 그들을 청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안적 논리, 이념, 이론, 역사 해석 없이 권력 집단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뉴라이트가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이유 아닌가? 지금 이들에 맞설 명확한 담론 체계를 가진 세력이 과연 존재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식민지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기억의 문제로 축소되고, 이 문제는 ‘일본 싫어하기’와 ‘독립운동가에게 감사하기’ 정도의 수준으로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광복절의 메시지를 분명히 하려면 ‘무엇에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8월 15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파시즘, 제국주의, 식민주의 반대라는 보편 원칙을 생략할 수는 없다. 식민지 조선이야말로 이 세 가지 역사적 ‘악’의 최대 피해자가 아니었던가. 일본은 앞으로 적대국이 될 수도, 동맹국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 세 가지는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 한국조차 저 원칙을 자기 것으로 명확히 수용한 적이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20세기 역사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배제하려 했던 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반일 대 친일’이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일본 반대’는 꽤 이상한 발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나라를 반대한다는 건 정확히 무엇을 반대한다는 말인가? 그 나라 사람을 반대하는 것인가, 국가 권력을 반대하는 것인가? 반대의 의미는 관계 단절인가, 상대방의 제거인가? 애초에 식민지 조선의 투사들이 반대했던 것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반대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말만 돌고 돌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광복절을 ‘일본에 관련된 걸 싫어해야 하는 날’ 정도로 이해한다.
한·일 관계의 쟁점이 계속 ‘과거사 반성’으로 수렴되는 것도 반대의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전후 독일이 일본과 구별되는 지점은 단순히 ‘진심 어린 과거사 반성’에 있지 않다. 독일은 파시즘과 단절한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기 위해 내부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반면, 제국주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은 단절보다 연속성의 관계에 있다. 과거사에 대한 현재 일본의 태도는 그런 연속성의 효과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한국이 제국주의, 침략 전쟁, 국가 폭력과의 단절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원칙으로 선언한다고 상상해 보자. 한·일 관계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친일파와 뉴라이트
반대의 대상이 모호한 문제는 친일파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친일파는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한국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된다. 인류 보편의 윤리적 원칙을 저버린 자가 아니라 ‘우리 등에 칼을 꽂은 자’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배신자는 상대적인 낙인이고, 정작 본인에게는 별 타격이 없다. 그는 식민 지배자를 ‘우리 편’으로 삼고, 과거에 ‘우리 편’이었던 것을 착취해야 할 타자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면 ‘친일파’는 기껏해야 모욕적 언어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친일파가 악인인 것은 ‘우리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시즘, 제국주의, 식민주의, 침략 전쟁, 국가 폭력의 현지 실행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조선인뿐 아니라 인류 공통의 적이었다. 뉴라이트의 존재를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핵심 이유는 그들이 친일을 옹호한다는 사실보다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고, 폭력, 파괴, 전쟁, 착취의 역사를 긍정한다는 점에 있다.
‘반일 대 친일’은 뉴라이트를 공격하기에 너무나 어설픈 구도다. 이 구도는 절대적·보편적 원칙을 제거하고, 모든 문제를 우리와 상대방의 관계로 축소한다. 이른바 건국 시점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논쟁이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가 뉴라이트의 이념적 우세를 증명한다. 그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삭제하고, 모든 논의를 국가 체제 수립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들이 말하는 건국은 그 자체로 반민주주의적인 관념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국가중심주의에 맞서려면,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 그리고 이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했던 인류의 저항에 근거해야 한다. ‘1948년 건국’에 맞서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도 않고, 전략적 효과도 없다.
결국 역사에 관한 헛소리를 차단하고, 후세에 전할 메시지를 찾으려면 보편적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와 상대방의 양자 관계에서 벗어나, 인류 보편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특수한 역사를 바라보고, 거기서 다시 보편 원칙을 발견해낼 수 있어야 한다. 보편적 관점의 부재야말로 뉴라이트의 탄생과 성장의 최적 조건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