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세 가지를 조심하라고 했다. 청년 시기엔 여색을, 중년 시기에는 싸움을, 노년 시절엔 아집을 경계해야 한다며 ‘군자삼계(君子三戒)’를 강조했다. 나이 들수록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데,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단속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예순을 넘기며 깨달은 게 있다. 어른의 척도는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가 성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나이는 시간이 지나면 늘게 마련이지만, 성숙함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른답지 못하면 어른이 아니다. 어린 사람도 어른답게 의젓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의젓잖은 사람도 있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이 많으면 사회는 미성숙 상태에 머문다.
‘나잇값이 비싼 때’는 지났다
우리 사회는 나이에 민감하다. 차량 접촉사고가 나거나 말다툼이 벌어지면 ‘너, 몇 살이야?’부터 따지고 든다. 논리가 막히거나 상황이 불리해지면 여지없이 나이가 등장한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도 나이로 서열을 정리한 후 얘기를 시작한다. 참으로 나이를 중시하고 따진다.
나는 사회생활을 남들보다 2년 정도 늦게 시작한 탓에 어느 직장에 가든 동기들보다 형이었고, 내 직속 상급자와 비슷한 연배였다. 어쩔 수 없이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입사 동기들보다 점잖아야 했고, 같은 연배의 상사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선 어른스러워야 했다.
직장생활에서는 응당 연공서열이 강조됐다. 근속 연수나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지위가 올라가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능력이나 실적보다는 근무 연수나 나이가 중요했다. 사석에서 한두 살 정도는 말을 놓고 지내기도 했지만, 공적으로는 나이에 엄격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어린 사람으로서 나이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하느냐 여부가 그 사람의 태도와 자세를 결정했고, 그런 것이 그 사람의 평판과 사회생활의 성패를 좌우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환갑을 맞으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장수를 축하할 정도로 평균수명이 60세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엔 경험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경험을 했고, 지식과 정보가 한정되고 부족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게 경험이었다. 그야말로 나잇값이 비싼 때였다.
하지만 이제 나이 먹은 것이 벼슬인 시대는 지났다. 상대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하는 자세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나이를 무기 삼아 사람들 사이에서 군림하려 하면 사회로부터 고립돼 더욱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인을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르며 경계한다.
지금은 누구나 오래 산다. 2024년 7월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내년이면 전체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사회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세대의 경험이 이젠 유용하지 않다. 요즘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서는 과거 경험이 미래를 점치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 어렵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옛말일 뿐이다.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의무
그에 반해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기간은 길어졌다. 직장을 은퇴해도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 어른답게 살 필요성이 더 커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어른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어른다운 삶일까? 나는 어른다움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첫째, 배울 점이 있어야 한다. 어른은 어린 세대의 모범이 돼야 어른이다. 젊은 세대가 노인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노인이 자기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권위를 내세우며 대접받으려고만 해서일 것이다. 어른이 어른으로서 당당하게 대우받기 위해서는 은퇴 후에도 심신을 연마하고 공부해야 한다. 성장과 발달이 학창 시절과 직장생활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학습과 성장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인 물이 되어 쉰내 나는 노인네 취급받기에 십상이다.
둘째,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 투정 부리거나 투덜대지 않고, 어리광부리며 남에게 기대지 않고 의연하고 의젓하게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어른이다. 국어사전에서 ‘어른’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어른이란 자신의 인생에 떳떳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 말조심해야 한다. 말을 독점하거나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한다.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귀를 열어야 한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갑 문제라면 오히려 간단하다. 상대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지갑을 열든가,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아예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말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고정관념이나 한정된 경험의 벽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끝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선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선조들의 가르침대로 ‘3노’를 삼가야 한다. 노여움, 노파심, 노욕이 그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여겨 섭섭하기 쉽지만, 이를 인정하고 노여운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져 자꾸 간섭하게 되어 잔소리가 늘게 되니 이를 조심해야 하며, 나이 들수록 예의와 염치를 차릴 필요가 없어져 고약한 노인네가 되기 쉬우니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나이를 먹었는데 나잇값을 못 하는 것이야말로 꼴불견이다. 흔히 ‘나잇값’은 특정 나이에 어울리는 사회적 규범과 기대를 충족하는 것을 뜻한다. 나잇값은 나이만큼 쳐주지 않는다. 누구나 노인이 되지만, 아무나 어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인은 많지만 어른은 드물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글을 쓰려고 인터넷 서점에 가서 ‘어른’을 검색해봤다. 일본의 만화가 야마다 레이지의 <어른의 의무>란 책이 뜬다. 그는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의무라고 말한다. 어른이 멋있게 늙어가야 젊은 세대에게도 희망이 있고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불평하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며,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예순을 훌쩍 넘은 지금 나는, 그저 나이 든 노인으로 늙어갈 것인가, 진정한 어른이 될 것인가, 분기점에 서 있다. 나이를 먹는 것,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주름살이 느는 건 어찌할 수 없을지라도, 나이 든 꼰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강원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