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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드라마 중 재밌게 본 작품으로 저는 항상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첫손에 꼽습니다. 2019년 시즌 1이 나왔고, 저 말고도 재밌게 본 시청자가 많은지라 시리즈가 이어져 지난해 시즌 4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Sex Education’, 직역하면 ‘성교육’입니다. ‘비밀 상담소’보다는 훨씬 재미없는 제목이죠.

이 드라마의 배경은 영국의 한 고등학교입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 교사입니다. 이것만 보면 청소년들이 봐야 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 시청등급은 ‘청소년 관람 불가’, 이른바 ‘19금’입니다. 학생들의 ‘성생활’과 ‘성정체성’, 이를 둘러싼 고민이 시리즈의 주요 주제이고, 여기에서 많은 이야기가 빚어집니다. 이를 묘사하는 장면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붙었습니다.

유럽이라면 개방적으로, 거침없이 성교육을 할 것으로 여겼는데 드라마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한국어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주인공 오티스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유료 성 상담을 해줍니다. 오티스는 같이 사는 어머니가 전문 성 상담가이기에 누구보다 이론에는 밝습니다. 오티스는 어른들이, 또는 공교육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틈새를 파고들어 ‘사교육 시장’을 개척합니다. ‘진짜’ 성 전문가인 오티스의 어머니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현실과 동떨어진 성교육 내용에 충격을 받고 직접 학교로 들어가 성교육을 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유럽에서도 성교육은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주간경향 이번 호는 표지 이야기로 한국의 성교육 문제를 전해드립니다. 한국에서 ‘과외 성교육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학교 성교육이 아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학교 성교육은 ‘공허하다’는 평을 많이 듣습니다. 법에 따라 성교육을 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정작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없습니다. 2015년 나온 성교육 표준안과 지도자료는 많은 문제점이 발견돼 사실상 폐기됐습니다.

그렇다고 성교육을 사교육 시장에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성교육은 누구나 받아야 하는데 모두가 사교육 시장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또 사교육 시장에서는 부적합한 내용을 걸러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학교 성교육을 바로 세우려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들이 지향하는 성평등 관점의 성교육, 학생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는 성교육이 무엇인지도 살펴봤습니다. 가정에서 성교육을 고민하는 양육자를 위한 Q&A도 준비했습니다. 포괄적 성교육 철학을 갖고 학교, 공공기관 등에 다양한 성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성교육연구소 라라’의 노하연 대표가 다양한 질문에 다정하게 대답해 드립니다. 독자님들이 이미 집에서 아이들에게 받아본 질문도 있을 겁니다. 저도 정독하겠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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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